문화시대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한겨레21

민족을 비켜간 유미리의 문학

(사진/유미리는 한국적과 한국이름을 고집하면서도 민족적 관심은 희미하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유미리가 한국을 다녀갔다.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다가와상 97년 상반기( 제116회) 수상자인 유미리(29)의 한국 방문은 한바탕 회오리바람과 같았 다. 아니, 차라리` ‘태풍 유미리호’라고나 불러야 할까.

5박6일에 걸친 유미리의 한국 체류는 ‘`강행군’ 바로 그것이었다. 19일 도착한 유미리의 공식 일정은 20일 오전의 합동 기자회견으로부터 시작됐 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합쳐 1백여명이 몰린 이날 기자회견은 작가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황이었다. 유미리는 그 날 오후 교보문고에서 독자 사인회를 가졌고, 이어서 세종문화회관 대회 의실로 자리를 옮겨 ‘독자와의 대화’ 행사에 참여했다. 사인을 받겠다 고 몰려든 2백명 넘는 독자들의 ‘꼬리’를 자르고서도 예정된 시각보다 10여분 늦게 행사장에 도착한 유미리는 벌써 지쳐 보였다. 오전 기자회견 때와는 달리 목소리도 잠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쉴 수는 없었다. 2 백50석 규모인 이번 행사장에도 보조의자까지 동원해 3백명이 넘는 인원 이 들어차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업적 냄새 물씬 풍긴 방한 풍경

소설에 앞서 희곡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유미리의 방한 일정은 연극쪽에서 도 분주했다. 당장 20일 저녁 그의 희곡으로 만든 연극 `물고기의 축제' 관객을 상대로 한 사인회가 있었고, 출국 전날인 23일 오후는 정동극장 주최로 청소년 대상 강연회와 또 한번의 관객 사인회, 관객과의 대화 행 사에 할애되었다. 그 사이의 이틀은 각각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의 카 메라가 그의 뒤를 하루종일 쫓았다.

유미리에 대한 이같은 열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령, 그것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나, 같은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유미리보다 먼저 아쿠다가와상을 받은 이회성씨의 방한에 비해서도 훨씬 요란하고 성대했다. 그것을 단지 출판사쪽의 상업적 고려와 언론 플레이 의 탓으로만 돌려야 할까.

20대 후반의 나이에 매력적인 외모, 고교 중퇴의 학력과 몇 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로 대표되는 청소년기의 방황, 불행한 가족관계를 소재로 삼은 그의 소설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유미리 붐은 정작 유미리 문학의 본질에서는 조금 벗어난 느낌을 주었다.

유미리를 맞는 한국인들이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 유미리의 발 밑에 카 펫 대신 깔아놓은 것은 2월 하순에 있었던 도쿄에서의 사인회 취소 사건 이었다. 우익을 자처하는 사내가 “조센징이 일본과 일본인을 우습게 그 렸다”며 사인회 장소인 대형서점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를 걸어옴으로 써 비롯된 이 사건에 한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표했고, 보도를 접한 한 국인들 역시 그 사건에 막중한 정치적·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터였다. 20 일 오전의 기자회견이나 그날 오후 독자와의 대화 시간에서나 예의 사인 회 중단 사건이 첫번째 질문으로 제기됐다.

요컨대, 한국에서의 유미리는 민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미리는 과연, 민족주의는 아니더라도 민족의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였던가. 아쿠다가와상 수상작을 표제로 삼은 `가족 시네마' 와 이즈미 교카상 수상작을 표제로 내세운 `풀하우스' 두권의 소설집을 근거로 말해 보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수상작답 게 그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 `가족 시네마'를 비롯 해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유미리가 끈질기게 매달린 것은 가족의 해 체라는 주제다. 그의 많은 소설들이 재일 한국(조선)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그들에게 갈등과 슬픔과 고 통을 초래하는 문제들은 민족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다. 재일 조선 인이라는 피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고도경제성장의 부산물로 일본 사회 전체가 부닥치고 있는 가족의 해체=개인주의의 팽배라는 현상이 범인이라 는 것이다.


“불행한 과거는 글쓰기 주제 아니다”

기자들과 일반 독자들이 한사코 유미리를 민족(주의)쪽으로 끌어가고자 노력했음에도 그 노력이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에는 유미리 자신의 비(非)민족(주의)적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사를 뉘우칠 줄 모 르는 일본과 일본인들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한-일간 과거사를 공부 해서 그것을 작품으로 써 주길 바란다”는, 87세 된 노인의 당부에 대한 그의 답은 확고했다.

“작가로서 나는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늘 대답을 유보해왔다. 소설( 小說)이라는 말의 한자에는 이 장르의 진실이 들어 있다고 본다. 개인을 다룸으로써 정치나 민족문제와 같은 큰 문제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나라는 개인이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한- 일간의 불행한 과거에 대해서라면 지금 생각으로는 글을 쓸 것 같지 않다 .”

질문을 한 어른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유미리의 대답에서 심지어는 배 신감조차도 느꼈을지 모르겠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면서 한국적 과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있는 그가 “아파트 한채조차도 내 이름으로는 빌릴 수가 없어서 친구 이름으로 빌렸다”면서 “작가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 보자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말할 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던 그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유미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리라. 민족에 대한 무관심이 라고나 할 이같은 태도는 유미리의 탄생과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자기에게 한국어란 음습하거나 폭력적인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일본어라는 공기 속에서 자란 그가 한국어를 접할 때라고는 부모가 아이들에게는 감추어야 할 비 밀스런 이야기를 속삭일 때나 아니면 거꾸로 저주와 욕설을 큰소리로 퍼 부을 때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이라든가 한국이라는 것도 그에 게는 비슷하게 받아들여졌을 터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민족주의적 소설을 기대하는 한국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소설을 민족주의적으로 오독하 여 폭탄 테러 위협을 한 일본의 극우파 사나이와 같은 반열에 놓여 있다 고 말할 수조차 있으리라. 유미리의 소설을 민족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려 한다는 점에서는 그러하다는 말이다.


정체성 확인 위한 노력 지켜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유미리 문학의 범위를 미리부터 좁혀 놓을 까닭도 없을 터이다. 20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장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어찌해서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헤쳐 볼 생각”이라는 그의 말이 공연한 인사치레나 외교적 발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작업이 자신의 말대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하나의 훌륭 한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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