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한겨레21

입시 바꿔야 영재가 산다

영재를 판별하는 기준으로는 보통 미국의 심리학자 렌쥴리가 제안한 ‘영 재 정의 모델’이 적용된다. 그에 따르면, 영재는 지능지수(IQ) 1백30 이 상에 과제 집착력, 창의성 등 2가지 요소가 모두 상위 15% 안에 들어야 한다. 전에는 3%를 기준으로 했지만 현재는 개발가능성을 들어 15%까지 범위를 넓게 잡는다.


영재교육,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영재교육은 없고 범재교육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영재교육에 대한 전문가들의 탄식이다. 머리좋은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평범한 교육만 시킨다는 지적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영재교육은 독 립적인 법적 근거가 없이 사상누각처럼 이뤄지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명문화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여기 에 능력·적성·소질의 개인차가 무시되는 획일적인 수업과 입시제도가 영재교육의 취지를 흐린다.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문화가 여전한 현실도 영재교육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영재 선발은 대부분 학교성적을 잣대로 하고 있다. 중학교 성적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라야만 특수고인 과학고나 외국어고로 진학할 수 있다. 한국 과학기술원(KAIST)이나 포항공대 같은 고등 영재교육기관에 들어갈 수 있 느냐 여부도 기본적으로 학교성적이 좌우한다. 성적이 시원치 않으면 특 정한 분야에서 창조성을 보이더라도 영재교육의 기회가 봉쇄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영재들은 취학 전에 영재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기독교 방송 영재교육학술원의 하종덕 박사는 “취학 전 영재들을 위한 교육기관 이 사실상 전무하다. 서울에 한두 곳이 문을 열고 있지만, 혜택을 받는 아이들은 극히 소수다. 영재교육은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데, 우리는 지 금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의 재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경향이 강한 점 도 영재교육을 활성화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여기에 기계적인 평등 을 최선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문화까지 영재교육의 발목을 잡는다. 이러다 보니 이른바 신동들은 선정적으로 다뤄지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 결국 “신동들도 끝내 둔재로 변한다”는 식의 비아냥만 남는다.

중·고교에 올라가도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과학고·외국어고· 예술고로 대표되는 특수고를 보면 영재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이른바 명문 대학 진학률이 높은 입시명문고에 불과하다. 신흥 명문고의 판도를 바꾸 는 구실은 했을 망정, 영재교육의 발전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성적 위주의 현행 대학입시제도를 영재교육에 그 대로 적용한 탓이다. 과학고·외국어고·예술고가 본래의 뜻과는 달리 입 시교육에 매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예술분야 입시에서 가 장 중시해야 할 부분인 실기배점률은 30~50%인데 비해, 내신비율은 30~40 %에 이른다. 더욱이 예술고 학생들은 인문계 학생들과 똑같은 수학능력시 험을 치러야 한다. 외국어고와 과학고도 마찬가지다. 특히 지난 몇해 동 안 입시에서 돌풍을 일으킨 외국어고는 최근의 자퇴사태에서 드러나듯 획 일적인 입시제도로 인한 왜곡의 전형을 보여준다. 내신등급의 불리함을 이유로 학부보들이 자식의 자퇴를 종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문대학 합 격으로 모든 능력과 재능을 평가받는 현실에서 애초의 교육목표는 실종된 셈이다.


‘민족사관고’좌절이 던지는 교훈

특수고를 만들어놓고도 교재개발조차 학교의 재량에 맡겨두는 교육정책의 부재도문제로 지적된다. 이에 따라 특수고의 위상에 맞는 국가와 지방자 치단체 차원의 지원과 혜택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학교 재정을 전적으로 등록금에 의존하는 상황에선 전문적인 교육에 한계가 있 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원과 포항공대 등 영재교육 대학들은 미국 메사추세추공과대학(M IT)과 캘리포니아공과대학(CIT)을 본떠 일정한 성과를 이뤄가고 있다. 그 러나 획일적인 제도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 현행 입시제도에 기댄 영재 선발방식 역시 계속되는 논쟁거리다. 한 과 학자는 “고교 때 하던 방식 그대로 공부만 하는 과학자들을 양산한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지난해 의욕적으로 출범한 ‘민족사관고’의 좌절은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이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노력과 시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96년 3월 영재교육과 민족교육을 기치로 출범한 민족사관고는 중학교 성적 상 위 1%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4.5 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신입생을 뽑았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30명 가운데 13명의 학생이 학교 를 떠났다. 수학능력시험만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는 획일적인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시도는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한국영재학회(회장 이상희)를 중심으로 영재교육의 제도화를 추진하 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들은 올해 정기국회에서 ‘영재교육진흥 특별법’ 입법을 추진중이다. 영재학회 부회장인 이군현 교수(과학기술원 교양과정부)는 “특수고를 만든 지 만 14년이 지났지만 입시방식, 교육과 정 개발, 교원 우대, 진로 보장 등 당면한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 고 있다. 이는 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특별법’에 기대 반 회의 반

정부도 일단 특별법 입법에 호의적이다.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 조 석희 박사는 “과학기술처와 교육부 등에서는 특별법 입법의 기본방향에 동의하고 법안의 내용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별법 입법이 영재교육의 정상화에 얼마나 기여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영재교 육에 대한 사회문화적 배려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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