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한겨레21

정글속의 교수님들

지난 3월9일 과학기술원 전자공학과의 한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 사회에서 실력있는 사람만이 올라설 수 있다는 과학기술원 교수로 임용이 확정된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수재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실력이 모자란다”는 내용의 간단한 메모만이 그의 죽음 뒤에 남았다.

그러나 그는 누구 못지 않은 수재였다. 미국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항공우주국(NASA) 산하 위성추진체 회사인 JPL에 발탁됐고, 4년 뒤 에는 세계적 권위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에 들어갔다. 연구원 시절에도 저 명한 학술지에 56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채용심사’의 험난한 산을 넘어…

이 사건을 바라보는 과학기술원 교수들의 심사도 착잡하다. 학생들을 가 르치며 연구해야 하는 처지가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과학기술원에선 교수들 사이에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존재 한다”고 말한다. 교수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나 신경의 날을 바짝 세 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는 우선 채용심사라는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한다. 전임강사의 경우 박 사 학위만 있으면 별다른 연구실적이 없이도 임용이 가능하지만, 조교수 이상은 냉혹한 심사의 숲을 통과해야 한다. 희망자의 교육연구 경력, 학 술연구 실적 등이 엄밀하게 평가된다. 여기에 학과의 필요성과 학교발전 에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점수가 보태진다.

심사에선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학술지나 저서에 논문이 몇편이나 실렸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과학기술대나 포항공대의 경우, 부교수 는 논문점수가 8점 이상이어야 한다. 논문 한 편당 2점을 주기 때문에, 네 편 이상의 논문이 실려야 한다는 얘기다. 정교수는 더 엄격하다. 논문 점수가 16점 이상이어야 한다.

교수가 됐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엔 승진심사가 기다리고 있다. 정교수가 되기 위해선 부교수로서 4년 이상 재직하고, 논문점수가 16점 이상이어야 한다. 4년마다 새로 채용심사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MIT의 교수가 평균 한 해에 세 편 정도 논문을 발표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들은 논문 중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성 적 중압 감 못지않다. 실적이 없으면 승진이 안 되고, 몇해 묵으면 동료 간에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실제 과학기술원과 포항공대에는 같이 조교 수로 임용됐으나, 지금은 정교수와 부교수로 갈린 교수들이 꽤 있다. 과 학기술원 박선원 교수(화학)는 “논문을 제때 발표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 거나, 심할 경우 좌절하는 교수들도 있다”고 말한다.

연구프로젝트 또한 부담이다. 연구비 규모로 대학의 질을 평가하는 국제 적 추세에서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더욱이 교수는 함께 연구실을 쓰는 대 학원생들의 생활도 책임져야 한다. 포항공대 서의호 교수(산업공학)는 “ 대학원생 10여명을 부양하려면 1년에 2억원 가량의 연구프로젝트를 따와 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이것저것 빼면 대학원생 한명당 6백만원 정 도만 돌아갈 뿐이라고 한다.


“철책 근무에 선 병사들 심정”

학생들의 강의평가제도 적잖이 신경쓰이는 부분이다. 과학기술원은 현재 교수의 강의태도와 교재 내용 등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를 제도화하고 있 다. 교수에게 서면으로 전달되는 평가내용은 교수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 다. 대개 한 학기에 한 과목 정도 강의를 맡기 때문에, 강의 자체가 주는 부담은 가볍지만,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물론 교수들의 일상이 늘 억눌려 있는 것만은 아니다. 평소 자질이 뛰어 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도 남다르고, 연구를 마쳤을 때의 성취감도 크 다. 그러나 이곳에서 놀고 먹을 수 있는 묘책이란 애초부터 없다. 한 교 수는 이런 상황을 “철책 근무에 나선 병사들의 심정”이라고까지 비유한 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얘기다. 과학교육의 현장에서 교수들 도 학생들과 더불어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스트 레스도 쌓인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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