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한겨레21

우리는 지금 ‘공황’을 본다

마침내 추락하고야 말았는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그를 향해 굶주린 하이에나떼가 몰려든다. 한때 충 성스럽던 개들마저 그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엿본다. 그가 누린 권세에 비례하는 것일까. 떼거리들이 한달여씩이나 배를 채울 만큼 먹이는 크고 기름지다.

`한겨레21'은 3년 전 꼭 이맘때 이미 그의 운명을 밀납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돌진했던 이카루스에 견주었다. 또 자식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그 아비의 미래를 그렸다. 당시 그들에게 혹세무민의 ‘참언’쯤으로 들렸을 이 경고와 예언은 불행히도 적중했다. 신화 속에서 이카루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다름아니라 그 아비인 다이달로스였다.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자식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는 대통령의 사과는 아무런 반향 을 갖지 못한다. “자식을 이기는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그의 장탄 식조차 동정을 호소하는 변명쯤으로 들릴 뿐이다.

물론 그는 여전히 ‘만인지상’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 는다. ‘복제돼서는 안 될’즉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될 첫번째 인물로 매 도될 뿐이다. ‘만인지하’인 셈이다. 세상은 이렇게 비꼰다. “하면 할 수록 무식해지는 것은?”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것은?” 답은 조깅 과 칼국수다.

때문에 사람들은 지난 92년 대통령선거 때 상대 후보쪽에서 퍼뜨린 ‘점 괘’ 하나를 떠올린다. “YS가 당선되면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어떤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는 이미 ‘퇴진’한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한겨레21'의 관심은 그러나 그의 몰락에 있지 않다. 한때 핍박했던 인물 이라 하여 그들의 몰락을 즐기거나 그에게 가해지는 무수한 채찍질에 하 나의 채찍을 더하려 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먹이만을 골라 공격하 는 떼거리에 합류해 손쉽게 먹이를 구하려는 것은 본시 우리 체질과 맞지 않는다.

`한겨레21'의 관심은 제도로서 ‘대통령의 몰락’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을 우려할 뿐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에 의해 유지된다. 사회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은 중등학교 수준의 배움이다. 구심력 특히 권력의 구심력이 강하면 독재요 원심력이 강하면 ‘무정부적 방임’이 된다는 것 은 현실이다.

방임상태에서 진실로 방임되는 것은 국민이 아니다. 힘을 가진, 그리고 자신의 이해만을 관철시키려는 각종 족벌뿐이다. 경제 족벌이 그 하나요 정치권력을 균점한 정치적 족벌이 그 다음이요 여기에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군벌, 정보기관 등도 포함된다. 구태여 지난 80년 그 피의 혼란과 좌절의 경험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그 조짐은 이미 곳곳에 나타난다. 제도로서 대통령이 사라지고 그 결과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가 족벌에 맡겨지고 것이다.

뼈대가 박탈된 금융실명제 보완조처에서 그 조짐은 분명하다. 골격을 유 지하라던 그의 지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가 총재로 있는 신한국당 은 이런 조처를 포함해 그를 밟고 일어서려는 데 분주하다. 대통령의 눈 과 귀가 되어야 할 안기부 등 정보기관의 주요 간부들은 ‘새 주인’을 찾아 줄대기에 바고 공무원 역시 일손을 놓고 곁눈질만 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제도의 공황’이다.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에 연금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기부 등 권력기 구, 재벌 등의 금권 그리고 이들에 업혀다니는 정치권 등은 그를 지구상 에서 가장 화려한 감옥 속에 가둬두는 족벌들인지 모른다.


다시 찬바람 부는 들판으로

우리가 그토록 경계해 마지않던 동정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개인이 아닌 제도로서 대통령의 권위와 힘을 추스려야 한다는 원칙론을 말하려 함이다. 그것은 족벌이 아닌 국민의 입장을 견지해온 `한겨레21'로서 당 연한 도리다.

그러자면 김 대통령은 먼저 자신의 손발을 묶고 있는 족쇄를 스스로 벗어 던져야 한다. 불가의 참회에는 사참과 이참이 있다. 몸으로서 참회하는 것이 사참이요 삼라만상의 보편적인 진리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이참이라 한다. 모든 의혹을 해소하고 관계자에게 응당의 대가를 주도록 하는 것이 사참의 과정이라면 자신을 온전히 던져 보편적인 이치를 이땅에 세우는 것이 이참의 내용이라 할 것이다.

평생을 민주화에 헌신했던 초지로 돌아갈 일이다. 민주화란 국민의 것은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 방송의 문제, 노동법 안기부법 국가보안법의 문제 와 함께 행정규제 및 경제구조의 혁파는 그 내용을 이룬다.

다시 찬바람 부는 들판으로, 힘든 어깨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시전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한겨레21'의 바람이자 모든 국민의 바람일 것이다.

곽병찬/ 한겨레21 편집장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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