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김영삼 몰락, 야당 집권아니다”

(사진/"기회이자 위기."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김영삼 정권의 비틀거림이 즐겁지만은 않다.)

　김현철씨의 2천억원 리베이트의혹 등이 터져나오면서 김영삼 정권이 비 틀거리는 데도 야당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한보사건 초기에 대통령의 책임론을 거론하며 김영삼 정권과 사생결단의 자세로 싸우던 야당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야당에서는 오히려 이러다가 ‘헌정중단’ 사태나 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밑바닥 정 서를 이룰 정도다.

폭로위주보다는 대안제시 치중

그만큼 현 정국을 야당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김영삼 정권의 몰락이 결코 야당에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지난 3월22일 당소속 한보특위위원들과의 간담회 에서 “(한보사태는) 우리 당에 기회임과 동시에 위기일 수 있다”고 말 했다. 현 정국이 야당에 미치는 이중성을 강조한 것이다. 국민회의가 한 보사건 청문회와 관련해 폭로위주보다는 대안제시에 치중하는 등 신중하 게 접근하기로 한 것도 이런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등 야권은 현 정국을 사실상 힘의 공백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영삼 정권의 국정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권력의 핵이 흔들리고 있는 위기상황이라는 것이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당직자는 “북한이 식량난으로 권력의 통제가 먹혀들지 않는 국가파국 상 황이라면, 남한도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대통령의 권위가 상실된 무정 부상태”라며 남북한의 상황을 ‘정치적 공황’으로 규정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인 집권당의 몰락은 야당의 집권 가능성을 높 이는데도 야당이 김영삼 정권의 몰락을 반기지만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김영삼 정권 몰락=야당 집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국내 정 치상황 때문이다.

야권은 김영삼 정권의 위기가 야당에는 ‘호재’와 ‘악재’의 두 측면으 로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한보사건과 김현철씨 비 리의혹사건으로 김 정권이 ‘적당히’ 타격을 받을 경우에는 야당이 정국 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으나, 김 정권이 몰락의 상황까지 가게 되면 여야 ‘동반침몰’의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현 정국이 악화돼 김영삼 대통령의 중도퇴진 등 헌정중단사태로 번지는 것에 대해 야당이 분명한 반대입장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은 “이번 사태가 헌정중단 사태로까지 가 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김 정권이 적당한 타격을 받는 수준에서 현 정국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야당의 희망은 앞으로 정국주도권 장악과 관련이 있다. 야권은 김 정권의 힘이 약화되면 오는 12월 대통령선거까지 야당의 뜻대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김 정권으로서는 대 선 이후의 후환을 두려워해 대선과정에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 김 정권의 약화는 신한국당 대선후보군들에 대한 청와대의 장악력 약 화로 이어져 여권후보의 난립을 초래할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 다. 대선후보 선출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경우 후보선 출 단계부터 치열한 당내 싸움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일부 대선후보들이 신한국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김 정권의 약화와 여권 대선후보의 난립은 바로 야당이 상정하고 있는 최선의 상황이다.

‘민주화세력=국정무능력자’로 볼라

나아가 신한국당의 후보가 누가 되더라도 지난 5년간의 실정에 대한 ‘신 한국당 공동책임론’을 제기하면서 ‘신한국당 대선후보=김영삼 복제’라 는 최대의 공격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권 대선후보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신한국당=국가파산책임’이라는 여당의 무한책임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김 정권이 완전 몰락하는 국면이 되면 야당도 걷잡을 수 없는 판 이한 정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3김 동반책임 론’과 함께 야당의 김대중·김종필 총재의 정치적 퇴진이라는 위기를 불 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야당의 수평적 정권교체 주장 대신 여당의 세 대교체바람이 국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면서 야당 두김씨의 정치적 입지 가 급속히 약화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 정권이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김 대통령의 ‘돌발행동’ 가 능성도 야당으로서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야당을 물고늘어지는 물 귀신작전을 구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민련 한영수 부총재는 “김 대 통령이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강경책을 구사하는 경우 여권은 물론 야권에도 제2, 3의 권노갑이 발생할 것”이라며 “야권은 가급적 한보 청 문회를 조속히 가동해 국민여론의 향방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대책마련 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이 자포자기에 빠질 정도로 정국이 악화되는 것은 야당에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김대중 총재의 경우에는 김영삼 정권의 실패가 민주화세력 주도의 국정운영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쳐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못하고 ‘민주화세 력=국정무능력자’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최 근들어 부쩍 강조하는 ‘가투(거리투쟁)세력배제론’이나 ‘면서기론’도 같은 맥락이다. 김종필 총재는 최근 지구당개편대회 등을 통해 “국정운 영 경험이 없이 거리투쟁이나 한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된다” 거나 “면서기도 안 해본 사람들이 무슨 국정을 운영하느냐”며 민주화세 력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권력의 장악력이 약화되는 일반적인 레임덕(권력누수) 차 원을 넘어 권력의 공백상태에 처한 김영삼 정권의 초라한 모습은 야당에 도 고민을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김영삼 정권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 서 국민회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애매한 입장이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