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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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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경식 부총리 등이 참석한 경제장관 기자회견. 그가 발표한 `실명제 보완'조처에는 대통령의 의중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17세기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주식 브로커가 신바람나게 ‘주 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누구나 그렇듯 자신에게는 일 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이 순식간에 벌어지게 마련이다. 한순간에 돈을 다 털린 것이다. 빈털터리 주식 브로커가 주식시장을 빠져 나가는 모습은 비참했다. 비틀비틀 걸어나가는 브로커의 모습은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처럼 보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레임 덕’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사라진 대통령의 웃음
그러나 요즈음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레임 덕’이라는 표현만으로 는 설명이 안된다. 대통령 임기말의 권력누수 현상 정도가 아니라 총체적 인 권력의 공백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통령은 보이지 않 고 그가 행사해야 할 제도로서의 권력은 정치 경제 군 등 각 분야에 할거 한 물리적 힘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최근 한보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한 검사의 장탄식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무정부 상태다. 나라 기강이 총제적인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보사건을 조기에 매듭짓지 못한다면 앞날을 예측할 수 없 을 정도다.” 검찰에 불려간 한 참고인에게 이 검사가 털어놓은 얘기다. 검사는 이런 요지의 탄식을 늘어놓으며 사건 수사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이 참고인은 전했다. 협조란 다름 아닌 김현철씨와 관련된 이 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으라는 것이었다.
총체적 위기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무정부 상태’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임기말이면 으레 나타나는 권력누수현상 정도가 아니라 통제력 자체가 아 예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치권의 진단도 일치한다. “권력 공백기의 깊은 수렁 에 빠져있다”는 지적에서부터 “어떤 명의가 나와도 고칠 수 없는 중병 ”이라는 비관론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위기감에는 여야의 구분이 없다.
공백의 한 가운데에는 헌법상 여전히 최고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있다.
요즘 대통령의 웃음만이 아니라 핏기조차 사라졌다. 최근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을 만난 신한국당의 한 당직자는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 였다. 말이 거의 없었고 이쪽에서 말을 건네기도 어려울 정도로 표정은 무거웠다”고 전했다.
물론 차남 현철씨로 인한 국가적 혼란과 이를 다스리지 못한 자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정부 상태’로까지 치닫고 있는 권력 공 백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 자신의 처지나 도덕적 권위를 상실함으로써 어떤 결정이나 조처도 내리기 힘든 참담함이 그를 더욱 괴롭히고 있는 듯 했다고 이 당직자는 전했다.
지난 3월17일 김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만났다. 강 부총리가 취임과 동시에 실명제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해 적지않은 파문을 일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이날 만남과 관련한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는 뜻밖의 사건이었다. 김 대통령이 “실명 제 보완과 같은 정도의 이야기라면 나에게 먼저 보고가 있었어야 한다” 며 서운함을 표시한 뒤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 문했다.
그렇다면 강 부총리는 김 대통령에게 한마디의 사전보고도 없이 실명제 보완방침을 언론에 발표한 것이 된다. 실명제는 김 대통령이 내세우는 개 혁의 최대 상징물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젖혀놓고 실명제를 이리저리 뜯어고치려 했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칫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이와함께 17일 강 부총리에게 실명제 보완과 관련해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밟을 것과 골격은 건드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실 명제 보완책은 일체의 공론화 절차도 없이 18일 아침 발표됐고 그 내용 역시 골격을 전반적으로 ‘건드리는’ 것이었다.
공직사회의 ‘과도정부증후군’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권력이란 제도적인 권력만 이 아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된 지금은 형해화된 , 극히 형식적인 제도적 권력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시중에 나 돌고 있는 ‘식물인간 김 대통령’이라는 평가와 그리 거리가 멀지 않은 지적이다.
한보사건의 수사를 맡고 있는 검찰의 중수부장 교체문제에서도 심상치 않 은 기류가 감지됐다. 정부쪽에서는 고건 총리가 수사팀의 교체를 주도했 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강력한 요 구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어찌됐건 대통령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중수부장의 교체는 검찰총장 못지않은 대통령의 주요 결심사항이 었다.
특히 중수부장 교체 이후 청와대의 위상은 더욱 추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대검의 한 간부가 전해준 검찰 내부의 분위기를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이 간부는 23일 “한보사건 수사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는 청와대와 상의 해 수사결과를 처리하는 불법적 관행이 검찰의 치욕을 불렀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검찰이 뒤집어쓰고 있는 불명예는 모두 청와대 때문이라는 얘 기다. 그것도 불법적인 관행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또 “차제에 검 찰 수사내용을 대통령이나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보고하는 관행을 뿌리뽑 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의 수족이던 검찰마저 대통령과 청와대를 탄핵하는 꼴이었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한마디로 청와대가 마치 피의자꼴이 돼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러다가 대선자금 문제까지 터져 나오는 것 아니냐”는 초조함까지 드러내고 있다. 또다른 청와대의 한 관 계자는 “청와대에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고 푸념을 늘어놨다. 지난 4년 동안 강력한 권력의 중심축 구실을 해왔던 청와대가 뿌리 채 흔들리고 있 다는 지적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권력의 무게중심은 당쪽으로 급속히 쏠리고 있다. 최근 잇단 당직개편에서도 이 대표는 여권의 중심을 자신에게 옮겨놓는 성과를 거뒀 다. 상대적으로 청와대의 의지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당총재인 대통령 이 주어진 개편안에 결재만 했을 뿐이었던 것으로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이 대표쪽에선 아예 후보 조기가시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대표쪽 일부에서 ‘임기 6 년의 대통령을 하겠다는 각오로 난국을 수습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으로 알고 있다”며 씁쓸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교체기라는 특징은 이 대표로의 온전한 중심 이동도 허락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대권예비후보들의 반발은 피할 수 없고 이는 당총재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대선후보를 놓고 벌이는 이른바 ‘용들의 전쟁’은 통제불능의 ‘내전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또 힘의 공백에 따른 혼란은 공직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일보다는 줄서기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안기부의 정 보전이 상당히 치열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관계자가 말한 ‘정보전’이란 유력한 여권의 차기 대선후보 를 찾아 줄대기에 나선 안기부 관계자들의 모습을 빗댄 것이다. 임기말 안기부나 경찰의 고유 임무 가운데 하나는 공직사회에 대한 감찰 등을 통 해 권력누수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고건 총리가 취임 직후 새벽에 일선기관을 불시에 순시했을 때도 공직사 회의 이완 현상은 그대로 확인됐다. 일선 소방파출소에서는 당직자들이 모두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또 교통상황실 관계자는 업무파악도 안 된 상태였다. 교통체계 설명 도중에 몇가지 추가질문을 한 고 총리가 들 은 답변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 잘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급기야는 김한규 총무처 장관이 3월23일 “근무지 이탈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 줄서기’ 등 복무기강 해이행위와 관련해 적발자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엄 중 징계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공직사회 문제는 좀처 럼 해결될 것같지가 않다는 게 당사자인 총무처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유 는 간단했다.
“한보태풍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고 또 누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 는 상황에서 누가 단속하고 누가 단속당할지...”
한반도 전체가 위기
한보사건의 전면적인 재수사가 시작됨에 따라 정치권 및 정부쪽의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두번째 대규모 사법처리는 피하기 힘들다. 그 영향은 정 치권 및 공직사회 전반에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벌백 계’라는 경고도 정국변화를 뒤쫓는 이들의 발빠른 움직임을 제어하기엔 역부족이다.
이에 따라 심지어 여권에서조차 “김 대통령이 임기까지 대통령직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비관적인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난국 즉 한보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을 때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한보의 파장 여하 에 따라서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는 인식인 것이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김정일 역시 지난해 12월 북한 사회의 ‘ 무정부 상태’를 개탄했다고 한다. 한반도 전체가 위기인 셈이다.
김용성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