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연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한겨레21

날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창조물 ‘연’

(사진/이동이 자유로와 연싸움에 애용되는 방패연. 가오리연과 함께 우리민족 고유의 연들이다.)

어린 시절 연을 띄우며 겨울 찬 바람에 마주서 본 기억 하나씩을 지닌 이 라면 하늘에 꽂힌 그 연이 늘 가슴에 와닿는 것을 느낀다. 하늘은 예로부 터 인간에게는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날고 싶다’ 는 인간의 욕망은 그 옛날 풍운아 이카루스 이후 후예들에게 면면히 이어 졌고 이를 조금이나마 달래준 것이 바로 연이었다.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성행

연 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성별과 신분의 구별 없이 즐겨온 놀이다. 언 제 어느 민족이 처음 연을 공중에 띄웠는지 밝히긴 어려우나 여러 나라의 문헌으로 미뤄 고대사회의 제천의식에서 연날리기가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연에 관한 기록 및 전설은 고대 중국, 동남아, 인도, 그리 스 등 여러 곳에서 발견돼 오랜 옛날부터 연날리기가 성행한 것으로 추정 된다. 이 때문에 연은 각 나라에서 제각각 만들어졌다는 가설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말레이 반도 인근 섬의 원주민들은 고대로부터 대 형 연을 바람에 날려 그 풍력으로 배를 끌었고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연을 이용해 큰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4백년경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친구, 알타스가 연을 만 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가장 오래됐다.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기인 중 국 춘추시대(BC 770~476) 공수반(公輸盤)이라는 사람이 대나무로 까치 모 양의 연을 만들었는데 3일 동안 떨어지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고 한다. < 홍서>(鴻書)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태어나 전국시대까지 활동한 공수반은 직접 연을 타고 송나라의 도시를 염탐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BC 444). 이처럼 옛날의 연은 주로 군사용으로 쓰여졌다. 송(宋)나라의 고승(高承) 이 펴낸 <사물기원>(事物紀原)은 공수반보다 후대 사람인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연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우의 초(楚)나라와 유방 의 한(漢)나라가 마지막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다. 유방의 10만 대군이 지금의 서주 남쪽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군사를 포위했으나 항우의 역발 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그의 삼천 자제가 잘 싸워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한신이 항우의 군영 주위에 초(楚)나라의 노래를 부르도록 해 적군 의 사기를 떨어뜨려 궤멸시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四面楚歌). 한신은 이때 소가죽으로 만든 큰 연에 바구니를 매달고 거기에 몸이 가볍고 피리 를 잘 불었던 장량을 태워 초나라 군영의 머리 위에서 망향곡(望鄕曲)을 퉁소로 구슬프게 불게 했다.

이외에도 양(梁), 당(唐), 오대시대(五代時代) 등에 연에 관련된 고사가 나온다. 당나라 때 안록산이 겹겹이 싸여 있는 성안의 양귀비에 보내는 연서(戀書)를 연에 매달아 띄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르코폴로의 <동방견 문록>에도 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1282).

반란군을 섬멸한 김유신의 연

우리나라에서 연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 상조( 上條)’에 처음 나온다. 선덕여왕 16년(647년), 이 해는 선덕여왕이 돌아 가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해인데 대신(大臣) 비담과 염종이 “여왕으로서 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했다. 반란군과의 전쟁 중 월성에 큰 별똥이 떨어졌는데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 고 해 반란군이 크게 기뻐했다. 이때 관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 장군이 커다란 연을 만들어 밤중에 연 밑에 인형을 매달아 불을 질러 하늘로 치 솟게 띄워 올리니 먼 곳에서 보기에는 마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보였다. 적군은 기가 꺾여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고려 때는 최영 장군이 제주도의 목호(牧胡, 목축하던 몽고인)의 난을 평 정할 때 군사를 연에 매달아 배에서 절벽 위로 띄워 올려 상륙시켰다던가 , 불덩이를 매달은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보내 공격했다는 등의 이야기 들이 전해 내려온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때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 또는 작전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진덕여왕이 정월 보름날 밤 달구경을 나갔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대신들에게 “일년 내내 보름달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다음날 밤 대신들이 연에 달 모양으로 큰 원을 그려 여왕 앞에서 날려보내니 여 왕이 크게 기뻐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이 방패연의 일종인 꼭지연(또는 달연)의 기원이다.

한국연의 종류는 연의 형태와 문양에 따라 그 종류가 1백여종에 이르고 있으나 크게 한국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각 장방형의 중앙에 방구 멍이 뚫려 있는 방패연, 어린이들이 날리는 꼬리가 달린 가오리연, 그리 고 제작자의 창의성에 따라 만드는 창작연 등 3종류로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 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돼 일반화된 때는 조선왕조 영조(1725~76) 무렵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연날리기를 장려했고 즐겨 구 경했다. 당시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서울 광교와 수표교(조선 세종 때 청계천 2가에 놓은 다리, 1958년 복개공사로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다) 일대에서 벌어진 연날리기 잔치에 각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지방의 마을 곳곳에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연 날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해 정월 보름날 액막이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했 다. 대보름에는 연에 액(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쓴 뒤 자기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적어 얼레가 다 풀리도록 날려 올린 다음 실을 끊어버린다(<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등).

김수장(1690~?)도 사설시조에서 이 액막이연을 읊고 있다.

“이 시름 저 시름 여러 가지 시름 방패연의 세서(細書) 성문(成文)하여/ 춘정월(春正月) 상원일(上元日)에 서풍이 고이 불 제 올 백사(白絲) 한 얼레를 끝까지 풀어 띄울 제 큰 잔에 술을 부어 마지막 전송하세 둥게둥 게 높이 떠서 백룡(白龍)의 구비같이 구름 속에 들거고나 동해 바닷가에 가서 외로이 걸녀ㅅ다가/풍소소(風蕭蕭) 우낙락(雨落落)할 제 자연 소멸 하여라”

함남 북청지방에서는 정월 보름날이 되면 그동안 날리던 연에 불을 붙여 날려보내는데 밤하늘에 연불이 불꽃놀이처럼 퍼져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이 지방에서는 연이 다른 마을에 떨어지면 그곳 사람들이 연에 적힌 마을 이름과 연을 날린 사람의 이름을 보고 자기네 마을에 연이 떨어진 사실을 편지로 알려줬다고 한다.

한편 연을 날려보낼 땐 오랫동안 눈을 치뜨고 있어 눈을 상하게 된다. 그 래서 바람개비를 돌려 시선을 낮추게 하여 눈동자를 바로잡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유만공(1793~1879)의 <세시풍요>(歲時風謠) ).

일제시대 연날리기조차 법으로 금지

중국이나 일본의 연은 주로 높이 날리거나 모양 위주로 연을 만들어 감상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한국연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재주를 부 리거나 끊어먹기를 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정월 대보름에는 서울 수표교 근처 개울(청계천)을 따라 연싸움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 었다고 한다. 구한 말까지 연싸움 대회가 덕수궁 근처나 청계천에서 개최 되어 대신들과 사대부는 물론 국왕도 가끔 나와 구경하며 장려했다. 여기 에는 연싸움을 통해 풍년과 흉년을 점치던 제의(祭儀)의 감정도 있다. 그 러기에 연싸움을 잘하기로 이름난 사람은 부귀한 집에 초청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우리의 민속놀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1911년 ‘범죄즉 결령’을 만들었고 87개 조항으로 이뤄진 시행세칙인 ‘경찰법 처벌규칙 ’ 49조에는 “전선 근방에 연을 올려 전신을 방해하는 자는 재판절차 없 이 경찰서장, 또는 헌병분대장이 직접 형벌을 가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등 연날리기를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연날리기가 계속 이어 졌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연날리기에 무척 많은 관심을 나타내 55년 2월 연날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연날리기를 적극 장려했다. 하지만 60~70년 대 들어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전봇대와 고층빌딩이 솟고 아이들도 어른들 도 바쁜 세파에 시달리면서 연날리기는 이제 시골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옛 풍경이 되고 말았다.

연 띄우는 노랫소리가 사라진 곳에 우리의 하늘도 사라져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한쪽 가슴이 아려온다.

“연띄운다 연띄운다 대보름날 연띄운다/ 아래웃방 아낙들아 몸단장을 채 리고서/ 연걸리는 구경가세 연걸싸움 구경가세/ …(중략)…/ 보소보소 돌 이어멈 우리남편 연띄우는/ 저맵씨를 한번보소 뭘라쿠노 땃줄래야/ 우리 아범 연띄우는 저맵씨를 쳐다바라/ 탱금주는 저기술은 우리아범 제일이다 / …(중략)…/ 지하자하 조을시구 얼씨구라 조을시구/ 지하자하 지하자하 얼씨구나 절시구나”(경남 충무지방 <지연가>).

(<연의 역사와 민속>(전경욱), <조선세시기>(이석호 옮김), <한국의 민속 놀이>(심우성), <한국민속사 입문>(임재해 등) 참조)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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