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한겨레21

고향냄새라도 맡게 해주오

(사진/북한 흙을 실향민들에게 보내기 위해 용기에 담고 있다. 북한 당국은 북한 각지의 흙을 산지별로 나누어 포장하는 등 실향민들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북한 각지 흙 1백2t 반입

대북한 전문 교역업체인 효원물산(55·대표 김영일)이 북한의 함경남북도 , 강원도 등 9개도 전역에서 1백2t의 흙을 들여와 실향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소식이 나가자 흙을 요청하는 이산가족들의 편지와 전화가 쇄 도해 1월 말 현재 신청자가 7천명을 넘어섰다. 흙을 신청하면서 보내온 이들의 편지에는 북에 두고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어 실향민들의 아픔이 얼마나 가슴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실감나게 한 다. 그러나 이들은 ‘망향의 한’을 간직한 채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 고 그 아픔은 이제 자식들의 몫이다. 실제 효원물산에 따르면 신청자 중 70% 이상이 실향민을 부모로 둔 20~30대의 2세들이라고 전한다.

부모님의 고향이 함경북도 북청이라고 소개한 안혜경(여·37)씨는 “95년 5월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역에 뿌려드리고 싶어 북한 흙을 신청한다” 면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북녘땅 고향에 가고 싶다고 기차 삯을 달 라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고, 오미혜(21)씨는 “6�25 전 쟁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분만 남한으로 넘어왔다”며 할아버지는 지난 62년에 망향의 한을 간직한 채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95년 4월 59세의 나 이에 한마디 유언도 없이 고혈압으로 세상을 등졌단다. 그러나 세상을 떠 나기 얼마 전 당신의 3형제를 모아놓고 마치 유언처럼 평안북도 정주를 가리키시며 그곳에 계실 친할머니와 고모들의 이름을 적어 주고 통일이 되면 꼭 그곳에 가 혈육을 만나고 고향땅에 다시 묻어 달라고 간곡히 부 탁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한줌의 흙이라도 묘소에 뿌려주고 싶다고 했다.

70세의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한송수(39)씨는 “1·4후퇴 때 홀홀 단신으 로 남쪽으로 넘어온 아버지가 3형제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다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며 “중국을 통해 백두산의 흙이라도 묘소에 뿌려드리려고 궁리하던 참에 고향의 흙을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저승에서나 마 고향땅에 못 가본 한을 풀게 됐다”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제 겨우 14세인 신레미양은 “저를 가장 사랑해 주셨다는 할머니가 11 년 전에 꿈에 그리던 함경북도 길주의 고향을 못보고 돌아가셨다”면서 “늦게나마 할머니의 산소에 고향의 흙을 덮어드린다면 이 손녀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흙을 신청한다”고 말하기도 해 이산가족의 아픔이 2세 에 그치지 않고 3세에까지 대물림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님 한 풀자” 2세들 사연 답지

생존해 있는 실향민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한다. 나이 가 들수록 북녘땅 고향에의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고 있고 두고온 부모에 대한 죄의식, 혼자 뭘 그리 잘 살겠다고 마누라, 자식까지 두고 남쪽으로 향해야 했나 하는 깊은 회한 등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춘천에 살고 있는 실향민 강아무개(70)씨 부부는 고향의 흙이 도 착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서울행 새벽 첫 기차를 탔다. 고향의 흙을 먼저 손끝에 느껴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른 시각이라 흙을 가져온, 서 울 강남의 효원물산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문이 열리기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순간 고향의 모습이 꿈같 이 스쳐간다. 잠시 뒤 고향의 흙을 접한다. ‘이게 그리고 그리던 내 고 향의 흙인가.’ 흙을 두손에 감싸쥐고 이들 노부부는 부모, 형제가 그립 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효원물산의 관계자가 전한 이러한 실향민들의 절 규는 수시로 목격된단다.

이들 실향민의 자식들은 부모의 ‘망향의 한’이 뼛속 깊이 전해오는 모 양이다.

아버지는 황해남도의 해주, 어머니는 함경남도의 함흥이 고향이라고 밝힌 이상철(32)씨는 “6�25 전쟁 때 부모와 이모가 월남하여 친지 하나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명절 때마다 자식들이 볼까봐 집 밖에서 우셨다”며 자 식된 도리로 고향의 흙이나마 만져볼 수 있게 해드리고 싶다고 썼다.

최아무개(31)씨는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고성인데 그 곳엔 아버지 의 부모형제, 부인과 3명의 자식이 있답니다. 이곳에선 한번도 불러보지 못해 자식들의 이름조차 희미해졌답니다. 그래서 북녘땅을 향해 간절히 용서를 청한답니다. 그럴 땐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해진다”며 한줌 의 고향 흙이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사연을 보내왔다

평안북도 숙천이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김윤우(27)씨는 “잠깐 동안의 피 신이 어느새 45년 세월이 흘러 꿈 많던 청년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아버지가 변했다”며 “아버지가 남한에서 결혼을 해 우리 5남매를 두셨 지만 가슴 한구석의 허전함은 늘 메울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젠 통일의 기 대도 버려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 다. 그러나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고향의 흙 이라도 손끝에 느끼면서 작은 위안이라도 얻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고 설레임을 전했다.

실향민의 아픔은 시집 온 며느리에게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실향민을 시부모로 모시게 되면서 이산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14년 전에 고인이 된 시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라고 밝힌 정민영(여·40) 씨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북에 두고온 자식들이 항상 눈에 어른거린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한이 깊었으면 지금도 무덤 한쪽에 풀이 자 라지 않고 있습니다. 그곳에 고향의 흙이라도 뿌려드리고 싶습니다”고 울먹이며 흙을 달라고 간청했다.


흙 반입에 정치적 의미 담지 말라

26세의 주부라고 밝힌 김아무개씨는 “결혼 전만 해도 분단과 실향민이라 는 말이 낯설었으나 이젠 시아버지의 젖은 눈시울만 봐도 내가 먼저 돌아 서서 눈물을 훔친다”면서 “얼마 전 딸을 낳았을 때 북한에 두고온 여동 생과 닮았다고 글썽거리는 시아버지의 눈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 사연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이들 사연을 통해 놀라운 것은 실향민들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 난 이들의 자식들까지 떠나온 북녘 고향의 주소를 번지수까지 대부분 정 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향민들은 분단된 지 43년이 흘렀으나 한순간도 고향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을 감으면서도 자식들 에게 고향의 주소와 두고온 부모, 형제와 친지들에 관련된 내용들을 남겨 자식들이라도 고향과 부모, 형제를 꼭 찾아가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90년부터 북한에서 시멘트, 호두, 명태, 고사리, 당면, 로얄제리, 송화가루 등 20여가지의 물품을 들여와 대북교역의 선두 주자가 된 효원 물산의 김영일 사장은 북한 흙을 들여온 경위를 설명하면서 “우선 북한 당국이 전국 방방곡곡의 흙을 골고루 채취하여 남한에 보내준 것에 대해 정치적인 의미를 절대 두지 말아달라”고 조심스럽게 주문했다. 북한도 당초에 “물이나 모래는 교역차원에서 국제적으로 사고팔 수 있지만 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로 수출하기가 어렵다”며 남한으로의 흙 반출 에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95년 10월에 들여오기로 한 흙이 우여곡절 끝에 1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성사된 것인다.

북한당국이 긍정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절절한 사연들이 그대로 북한 고위층에 전달된 것이 주된 요인으로 전해졌다. “처음 북한 흙이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 지방에서 새벽같이 달 려와 흙을 요청하던 노부부의 모습, 매일같이 전화를 걸며 언제 고향 흙 을 만져볼 수 있느냐는 수많은 실향민들을 생각할 때 쉽게 포기할 수 없 었다”는 김 사장은 “실향민들을 실망시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지막으 로 호소한, 실향민들의 애절한 편지사연이 북한 최고위층의 마음을 움직 이게 했다”고 그때의 조마조마 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결국 북한당국은 “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판매는 할 수 없고 남쪽 이산가족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무상으로 보낼 것”을 결 정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북한은 9개도의 흙을 따로 포장, 원산지를 표시 해 실향민들이 그들의 고향 냄새를 좀더 절절하게 느끼게 할 것으로 기대 된다.

“무엇보다 부모님 묘소에 흙을 뿌리겠다며 북한산 흙이 들어오기를 학수 고대하던 실향민들과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남북한간 신뢰 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 보람을 느낀다”는 김 사장은 “최종적으로 북한 흙을 4백t 가량 더 들여와 2월중에 10만명의 실향민 가족에게 1~2kg 씩을 분배하여 가정에 보관하거나 세상을 떠난 조상의 묘에 뿌리도록 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남는 흙이 있다면 북한 지도 모양의 대형통일동산을 조성하여 실향민들이 언제든지 찾아가 고향의 향수를 느 낄 수 있게 할 생각이다”고 덧붙였다.


눈물자국 선명한 편지 끊이지 않는다

오늘도 계속해서 고향 흙을 요청하는 이산가족들의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 더구나 북한의 어려운 식량사정이 알려지고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이들 의 가슴은 더욱 미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설이나 추석 등 어김없이 명절이 다가오면 코흘릴 때부터 오늘날까지, 아니 언제까지라도 불려질 노래가 유난히 생각난다”는 어느 젊은 부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 여 오라”고 사연을 마무리했다. 이런 편지 위에는 눈물자욱이 선명하다.

임을출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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