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한겨레21

북한 핵폐기물 사태 쌀지원으로 막자

(사진/대만을 방문해 핵폐기물 수출에 항의, 삭발 농성을 벌인 장원 녹색연합 대표. 대만의 핵폐기물 문제는 한국과 대만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핵폐기물 유대’, ‘`대만의 핵폐기물 외교와 북한 식량외교의 절묘한 결합’ ` ‘핵폐기물 주며 친구 만드는 대만’ ‘한반도의 방사능 소동’ .

이번 대만과 북한간의 핵폐기물 이전거래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표현이다 . 어떤 표현이 됐든 구경거리가 된 듯도 하고 비정하기조차 한 이 `핵폐 기물 ‘거래’는 한국의 환경단체와 대만의 우익단체들이 각각 상대 나라 의 국기를 불태우는 사태로까지 발전하면서 극단적인 감정대립을 불러일 으키고 있다. 일부에선 핵폐기물 수송이 이뤄질 경우 군사적 수단을 동원 해서라도 해상봉쇄를 단행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그럴수록 해결책은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극단적 주장은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이번 북한과 대만의 `‘거래’가 복잡 미묘하고 냉엄한 국제정치 역학관계의 산물이라는 데 있다. 남북 분단과 대만-중국간의 특수한 관계 라는 기본구도 이외에도 그동안 한-중수교와 연계된 한국의 ‘대만 버리 기’, 그리고 중국의 북한에 대한 시장경제논리 관철이 겹쳐지면서 나타 난 중국-북한의 `‘멀어지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북한의 우표에 대만의 여가수가 등장해 언론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북한 우표에 등장한 테레사 등이라는 이 여가수는 95년 사망 하기 전까지 대만은 물론이고 홍콩·중국 등 동남아 일대에서 큰 인기를 누린 가수였다. 물론 북한에선 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 난데없는 대만 여 가수라니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내 대표사무소 개설까 지 거론되던 대만과 북한간의 심상찮은 관계개선 조짐과 관련이 있는 것 이겠거니 넘겨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핵폐기물 이전 거래를 보면 그동안 북한과 대만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과정을 꼼꼼이 되짚어보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다.

북한이 세계 각국에 식량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대 만과의 관계에서도 북한은 지난 5월 말 북한을 방문한 대만성 정부 및 의 회대표단에게도 1백만t의 쌀을 대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 다. 구오 춘 민 대표단장이 당시 밝힌 데 따르면 북한의 큰물대책위원회 가 20만t의 쌀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무상지원은 어렵고 빌려갈 것을 제의하자 1백만t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또 <아시아월스트리트> 최근 호에 따르면 그 뒤 여름이 되면서 대만 집권 국민당 산하의 유타이(裕臺) 상사는 1억달러 상당의 쌀과 비료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으로부터 물물 교환방식으로 시멘트와 아연을 받기로 하는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나타나 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5천5백만달러에 불과했다 . 어느 정도까지 거래가 진행됐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외무부 관계자는 이 로 인한 손해로 유타이 상사는 사장이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은 또다른 식량거래를 추진했다. 미국 곡물회사 카길 과의 50만t 거래는 미 정부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었다. 7∼8월에 걸쳐 이 문제는 한반도 4자회담을 위한 남북한 미국의 3자설명회 수용과 연계돼 풀렸다. 따라서 북한은 적어도 9월 잠수함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3자설명회가 열리면서 카길과의 거래로 50만t의 곡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 는 계산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잠수함 사건이 이런 북한의 식량조달 계획에 큰 타격을 줬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이 대만과의 핵폐기물 협상을 위한 접촉에 나선 것이 바로 이때라는 것은 우연이라 볼 수 없다.


북한, 남쪽 반대 우려 협상 조기체결 총력

대만전력공사 핵처리운영처의 천팡셴 처장은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 간> 최근호의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접촉은 지난해 9월이었으며 협상 당시 북한은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정보를 알고 저지하려 하자 관련문건을 밤 새워 번역하는 등 협상의 조기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그 는 북한쪽이 10여명의 번역인원을 동원해 밤새워 대만의 관련법규를 한글 로 번역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고 말했다. 잠수함 사건으로 인한 남북대 립과 식량조달 수단의 확보 필요성 등이 계약을 급진전시킨 셈이다. 대만 전력공사의 한 관계자는 한국이 이처럼 계약이 신속하게 체결될 줄을 예 측하지 못해 초기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북한은 남한이 방심하고 있는 허점을 틈타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이 주간지는 전 했다.

그렇다면 문제의 상당부분은 식량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접근방법은 이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 정부의 대응책은 대만 정부의 핵폐기물 이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라는 데 모아져 있다 .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미국은 대만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말했다. 유종하 외무장관이 말하는 “핵폐기물 반출로 얻는 이 익보다 외교적 피해가 더 큰만큼 대만쪽의 태도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이에 근거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대만에 `적절한 ‘메시지 ’를 전달했으며 `관련 당사국들과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등 압력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대만은 굴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외세의 힘을 빈 압력은 대만의 반감을 더 깊고 크게 만들 것 이다. 게다가 미국에게 진 빚은 어떻게 갚을 것인가. 또 북한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한 제2, 제3의 핵폐기물 거래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정부는 북한이 직면한 `‘위기’라는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고 남북관계의 틀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강태호 기자/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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