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커스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
|---|
(사진/안기부의 여권발급 방해로 지난해 8월 영국을 다녀오지 못했다는 화가 홍성담씨. "법으로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안기부법 개정에 대한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안기부의 월권 여 부를 가릴 작지만 의미심장한 재판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89년 평양축전에 걸개그림을 보냈다는 혐의로 구속돼 92년 석방됐던 화가 홍성담(42)씨. 안기부에 의해 두번이나 여권발급을 방해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낸 것이다. 지난해 8월 서울 민사지법 42부에 배당된 이 재판은 현재 심리를 끝내고 2월중에 있을 선 고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50일 만에야 나온 여권… 안기부의 보복?
홍씨는 법정대리인 안상운 변호사를 통해 낸 소장에서 “보통 3∼4일 만 에 발급되는 여권이 안기부의 불법적인 신원조사와 악의적인 발급허가 거 부로 50일 가량 미뤄져 막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 다. 홍씨는 지난해 8월4일부터 16일까지 국제앰네스티 영국본부와 글래스 고시 의회의 초청으로 두주간 영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 품 수십점이 글래스고시 현대미술관과 에딘버그 예술축제장에 소장 전시 된 것과 관련하여 개막식에 참석하고 영국의 미술인·양심수들과 만나기 로 돼 있었다. 물론 그는 참석하지 못했다. 7월4일 광주광역시 시민과 여 권계에 신청했던 여권이, 행사가 끝난 8월20일에야 나왔기 때문이다.
홍씨는 지난 93년에도 6월에 신청한 여권을 무려 4개월 만인 10월에 받아 야 했던 수모를 당한 바 있다. 독일 함부르크 양심수 인권재단의 초청을 받았던 그는 이때문에 당초 7월로 잡았던 일정을 11월로 미뤄 독일 방문 길에 올라야 했다. 홍성담씨는 “더이상은 못 참겠다. 법으로 응징해 나 와 같은 피해자들이 다신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재판의 피고인 국가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국가쪽 은 지난해 11월 서울지방검찰청 소송부가 작성한 서면을 통해 “안기부의 신원조사와 여권발급 지연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서면은 그 중요한 근거로 원고인 홍씨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유죄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는 ‘신원특이자’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내무부 장관 은… 출입국자의 신원특이자에 대한 신원조사서와 신원조사 월별통계를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보안업무규정시행규칙 제54조 3 항을 제시했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보안업무규정상의 신원조회 기간 30일을 초과할 수 있다는 대통령훈령도 꼽았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 반 전력자에 대한 ‘규정기간을 넘긴 특별한 신원조사’는 얼마든지 가능 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담당변호인인 안상운 변호사는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일축 했다. 홍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관해선 이미 93년 3월6일 대통령령 으로 사면복권이 돼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93년 독일 을 10여일간 방문하고 귀국한 전례에 비추어 여권발급 거부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홍씨는 자신의 여권발급 지연이 안기부의 악의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 92년 자신을 고문수사한 안기부 수사관들의 몽타주를 그려 고 문혐의로 고소한 데 따른 보복이라는 확신이다. “지난 93년 여권신청이 지연될 때 안기부 담당관이 찾아와 그러더군요. ‘고문경관에 대한 고소 를 취하해라. 그러면 즉시 여권을 내주겠다’고요. 안기부가 나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습니다.”
여권 못 받는 사람들 많다
사실 안기부가 시국사건 구속경력자의 여권이나 비자발급에 영향력을 행 사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안기부의 신원조사 권한과 ‘특별한 사유’라는 모호한 법 조항 때문에 행정권 침해 가능성이 상존했던 것이 다. 그래서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출국을 포기하거나 ‘찾아가 허가를 사 정하는’식의 소극적 문제해결방법을 찾기도 했다. 일부는 안기부가 요구 하는 각서를 쓰기도 했다. 홍성담씨는 이 문제를 처음으로 법정으로 끌고 간 셈이다. 그는 “1심에서 패소해도 끝까지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안기부 신원조회 권한의 위법성을 따지는 헌법소원 등 모든 절차를 동 원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 안기부쪽은 신원조회를 한달 이상 넘 긴 구체적 이유에 대해 곧 재판부에 경위서를 제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 졌다.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는 홍씨의 이번 재판을 통해 안기부의 여권발 급 거부문제가 공론화되기를 기대했다. “유원호씨 등 상당수의 양심수 출신들이 지금 여권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사상 의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여행권을 제한한다는 것은 정말 낯부끄러운 인 권후진국의 구태이지요.”
양식있는 대다수 시민들도 이번 소송이 안기부 악습의 고리를 끊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라고 있다.
고경태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