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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이 부부의 ‘작은 세상’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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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그런 소리가 좀 잠잠해졌지만, 언젠가 한동안은 만나는 사람마 다 “하예린 동생 안봐?”하고 묻곤 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형제가 없는 하예린이 안 되어 보인다며 그를 위해서라도 동생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한쪽은 역시 늙으면 자식밖에 남는 것이 없다며 마치 보험드는 기분으로(세상에!) 아이는 하나 이상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 두번째 부류 사람들은 이왕이면 “아들이면 더 좋지”라는 말도 넌지시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 남자가 40을 넘으면 아들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자기 동네 누구도 아이가 하나밖에 없는데 마흔이 넘은 이제 와서 야 아이 하나, 그것도 아들을 낳아보겠다고 온갖 처방을 다 시도해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사회는 아직도 역시 아들”이라는 세태분석도 마다 하지 않는다. 또한 내 남편도 한국 남자라면 아마 어쩔 수 없을 걸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다행히 나나 남편이나 아직 마흔이 넘지 않아선지, 두번째 부류의 입장은 솔직히 전혀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첫번째 입장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 정이다. 어느 부모가 자기 아이가 외롭길 바라겠는가. 더구나 형제자매가 어려울 때면 어려운 만큼, 기쁠 때면 기쁜 만큼, 전화로라도 시시콜콜한 것까지 의논하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형제자매라는 존재가 항상 든든한 버 팀목이 되어왔고 누구보다 형제자매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나 남편이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 이 아이가 느낄 외로 움을 생각하면 측은해지기도 한다. 과연 그때 이 아이는 자신의 일상을 누구랑 의논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심심해”를 입 에 달고 다니는 바쁜 엄마와 아빠를 가진 하예린의 입장으로서는 함께 놀 가까운 친구로서의 동생이 정말 간절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쩌랴. 나는 우리가 하예린에게 동생을 주지 않는 것을 그저 우리의 이기심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야 워낙 이 세상이라 는 전쟁터에서 ‘가족’이 겪는 온갖 상처를 매만져주고 닦아주고 위로해 주는 ‘가족 지상주의’적 분위기에서 커왔지만, 이제 세상은 혈연만 내 세우기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야 언제 놀이방 친구와 거의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엄마 아빠가 각각 자신의 일 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가정에서 자랐던가. 오직 자식만 바라보고 살던 이전의 우리의 부모들의 정서로부터 우리는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제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걸맞게 자신과 함께 할 사람을 꼭 혈연관계에 한정지을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가까이 있는 이웃, 함께 일하는 동료, 어렸을 때 함께 놀던 그리고 지금도 죽이 잘 맞는 사촌은 왜 기쁠 때면 기쁜대로, 슬플 때면 슬픈대로 함께 의논할 상대가 되지 못하겠는가. 나 는 이제 우리 아이에게 미안해하기보다 우리의 바뀐 현실을, 그리고 아이 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언젠가 이야기해주어 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변재란/ 영화평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