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한겨레21

중국의 자존심, 유학·도교의 복권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

오래 전에 할리우드영화 `북경의 55일'을 보았던 사람들은 찰턴 헤스턴에 대항하는 사악한 무림세력인 의화단이 하나씩 격멸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이 영화가 지금 베이징에서 상영된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올 까? 그 반응은 3편까지 절찬리에 상영되었던 `황비홍'이 대변해줄 것이다 .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그 아류인 교활한 일본인을 전통무예의 역량으로 굴복시키는 `황비홍'의 취지로부터 우리는 의화단의 부활을 보게 된다. 이 부활은 중국의 자존심 곧 전통주의의 복권에 다름 아니다. 근대 이후 혁명론자와 진보론자들의 집중포화에 맞아 제국의 멸망, 열강으로부터의 피침, 낙후된 정치·경제 등의 모든 죄업을 뒤집어쓰고 멸실(滅失)의 지 경에까지 놓여야만 했던 중국의 전통사상은 이제 오랫동안의 패배주의와 자비감(自卑感)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북경의 55일'에서 `황비홍'까지

중국 사상계의 이러한 변화는 그리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80 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감화를 딛고 새로운 문화노선을 마련하기 위해 전개된 이른바 ‘문화열’의 쟁론은 전통과 현대화라는 상호모순의 명제 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1백여년 전의 과제를 다시 현안화시켰고 이 과정에서 전통의 문제는 청산이 아닌 재평가와 재검토의 대상으로 부 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인식변화의 배경에는 사회주의의 퇴조라는 커다란 정치적 소인이 있다. 급격한 개방, 자본주의의 대두는 중국인들에게 곧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가져왔고 이러한 현실이 전통으로의 복귀를 촉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외부 사조의 유입도 중국인 스스로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 헨 등에 의한 구미의 수정주의적 동양학은 종래의 충격-반응, 모델을 반 성하고 내재발전론적 관점을 제공하였으며 사이드 등의 탈식민주의론, 데 리다·푸코 등의 서구중심신화(White Mythology)의 해체 등의 작업은 반 사적으로 중국 전통문화의 지위를 제고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어떠한 항목들이 새롭게 평가되고 금세기 이후의 대안으로까지 기대되고 있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1980년 대 이후 신중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전통사조로서는 지 난날 근대화를 가로막았던 주범으로 인식되었던 유학(儒學)이 떠오르고 있다. 막스 베버 등 서구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미발달과 사회정체성의 설명요인이 되기도 했던 유학은 현대에 이르러 동아시아식 의 경제발전 모델을 만들어낸 탄력있는 사상체계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 하버드대학의 뚜웨이밍(杜維明)을 위시한 이른바 신유가(新유家) 학자 들은 경제번영을 이룩한 일본·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교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 이미 사멸 한 줄 알았던 유학이 자체의 적응논리를 갖고 서구 자본주의와는 다른 유 교자본주의의 방식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서구자본주 의의 폐단을 극복, 21세기의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새로운 이념적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이들은 유학의 역사를 3단계로 구분하여 한(漢)·당(唐)시기를 제1기, 송 (宋)·명(明)시기를 제2기, 이후 현대까지를 제3기로 보면서 유학이 지금 도 역사적 전개과정중에 있는 생동하는 실체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 은 최근 대륙 학계에서 일고 있는 복고적·민족주의적 성향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지식계층으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증이 되어주어야 할 일본 및 한국의 학자들로부터는 신판 중화주의라는 의혹을 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정황이 과장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 우선 일본의 경우 같은 유학이라 하더라도 충(忠)·효(孝)등의 개념이 중국 및 한국과 같지 않으며 불교 및 토착사상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헌팅턴은 아예 유교 문화권에서 일본을 제외시키고 있다. 신유가 학자들 은 한국의 퇴계학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제3기 유학에 일본을 잡아넣기 위한 연결고리로서, 주자 이래 정작 본토에서 유학의 간판스타 가 없다는 고민 등에서의 정치적 배경을 감안하면 우리가 무턱대고 환영 해야 할 일은 아니다. 고대든 현대든 유가 이데올로기의 궁극적 귀착은 항상 중국으로 향해왔다는 현실에서, 이 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신유가 가 세계적 패러다임은커녕 동아시아의 이념모델로서도 가능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서구학계에서의 ‘도교’수용

신유가가 주로 중국인 학자들에 의해 미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 에 비해 오히려 서구 학계에서 적극 수용되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동양의 힘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교(道敎)이다.

본래 유교와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토착사조였던 도교 역시 근대화의 과 정에서 미신과 비합리의 대명사로 비판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장 철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의 이념은 쇼펜하워 이래 서구의 반이성주의적 사조에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의 철학과도 긴밀한 교섭관계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도교의 생명주의는 생태학·환경윤리 등에서 즐겨 채용하는 관점 이 되고 있으며 최근에 촉망받는 사조로서 떠오르고 있는 생태여성주의(E co-Feminism)와도 이념적 교감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도교의 지류 혹은 친연관계에 있는 항목들로 한의학·풍수설 등이 실제적인 차원에서 근대 과학의 폐단을 보완하는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음양오행설 및 역학(易學 )사상이 양자역학·카오스이론 등 신과학의 설명원리로서 채용되고 있는 것도 넓게 보면 도교의 활용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외부적 현실에 자극받 아 천꾸잉(陳鼓應), 꺼롱진(葛榮晋) 등 도교학자들은 역사적으로 동아시 아 내에서도 유교 인물주의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던 도교가 이제 새로운 시대 즉 신도가(新道家)의 시대를 맞았다고 보고 향후 세계적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도교는 유교와는 달리 주변문화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중화주의의 혐 의를 덜 받고 좀더 보편적으로 수용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도교는 일종의 문화복합으로서 정합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객관이론화하는 작업이 지루하며 그 과정에서 도교의 본질이 과연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도교는 이제까지의 역사과 정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주류문화에 대한 비판, 보완적 기능만을 담당할 수 있을 뿐 도교 본질 그 자체가 문화의 정형이 되기 어렵다고 보는 회의 적인 시각도 있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좀더 통합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즉 유교와 도교의 장점과 특성을 아우를 수 있는 그들의 공분모적인 이념 과 원리를 추출하여 미래세계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념과 이 이념 을 구체적으로 작동시키는 기론(氣論)이라는 체용적(體用的) 구조를 갖는 이론모델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최근 점증하고 있는 전통 으로의 회귀 풍조에 힘입어 중국 내의 많은 학자들이 철학·문학·사회과 학 등의 각 방면에서 고대문화 유산의 현대화와 이 문화를 위한 묘안을 짜내고 있다. 이들 중에는 고대 병서로부터 처세전략을, 고전소설로부터 경영·관리 이론을 끌어내는 등 아주 실용적인 것들도 있다.

(사진/`패왕별희'는 중국적인 것이 영화 산업에서 세계적인 상품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성공작이었다.)


전통과 현대성 사이에서의 긴장

그렇다면 중국인은 과연 자신들의 전통문화의 역량을 전폭적으로 신뢰하 며 그것이 미래의 보편문화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가? 최근 한 백연구재단이 한·중·일 삼국의 지식계층을 대상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 의 미래의 역할과 관련한 설문에서 그 대답은 예상밖이었다. 한국의 경우 응답자의 다수(90%)가 자신감을 피력했던 데 비하여 중국의 경우 정반대 로 대부분(78%)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들에 비해 일본은 이 러한 문제의식 자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었 다. 설문조사 결과가 예시하는 것은 현대화의 도정에 있는 중국이 아직 과거에 입었던 문화적 충격의 외상으로부터 회복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서 예시했던 탈근대를 위한 나름의 기획들은 일부 지 식계층의 앞서간 전망일 뿐 이들은 중국의 전반 지표가 만족스러운 경지 에 이를 때에야 힘을 예증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중국의 복고적, 민족주의적 추세는 사실상 근대에 입었던 외상의 반면적 표현에 다름 아 니다. 중국이 현대화의 과정에서 이 외상을 극복해 나갈 때 비로소 자민 족 중심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 전통의 세계화라는 대도를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패왕별희'는 어떻게 중국적인 것이 영화 산업에서 세계적인 상품성을 획 득할 수 있는가, 이를 전략적으로 성공시킨 작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 동방불패'에서 묘족으로 대표되는 주변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유구한 편견 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향후 전통과 현대성 이 양자간의 긴장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에 따라 과연 중국적인 것이 보편적일 수 있느냐의 성패 가 결정되지 않을까?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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