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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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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래/ 한국외대 부총장·과학사
6년 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갔다가 시내에 있는 박물관에서 18세기 서 양에서 만든 중국풍의 도자기를 구경한 일이 있다. 미술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서양 사람들이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흉내내기 시작한 것 은 17세기 이후 서양에 전해진 동양에 대한 인상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 양의 도자기에서조차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깊이 느껴 이를 모방하기 시작 한 것이다. 그 좋던 시절 서양이 동양을 예찬한 것은 도자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중국 것에 대한 예찬과 흉내내기를 일러 서양 역사가들은 ‘중국증’(中國症:choiserie)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양인들이 중국을 예찬한 이유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그 문명을 예찬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당시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 작한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의 여러 가지 측면을 좋게 수식하여 서양에 알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상으로 중국을 칭찬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 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중국을 이상향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편 지를 교황청이나 그 밖의 선교 본부, 그리고 당시 유럽의 지식층에게 알 리면서 선교사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또 자신들의 환경 을 미화하게 마련이었다. 자연히 중국의 유교 내지 도교적 전통이 크게 미화되고 중국의 통치체제는 이상적 정치라 예찬되었다. 둘째는 당시 유 럽 지식층의 비판의식이 높아진 데에 원인이 있다. 이성의 시대로 접어들 면서 새로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과 함께 서양 지식인들은 그들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유럽의 포악한 전제 군주들이 이들 에게는 못마땅했다. 중국의 개명된 군주정치를 예찬함으로써 그들은 그들 사회의 정치적 개혁을 도모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 이 점에 서 그들은 성공하여 소위 서양에 개명군주시대를 불러올 수 있었다.
18세기 초 서양의 일반 지식층이 중국이나 일본을 어떻게 보았던가를 살 피기 위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 보아도 충분하다. 제3판은 태평양 가운데의 어느 이상적 섬에 표류했다가 돌아가는 걸리버를 그리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스위프 트는 여러 가지 중국인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걸리버가 일본인의 도움을 받고 또 일본을 여행하고 귀국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 성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스위프트가 묘사한 중국과 일본이 상당히 이국적이고도 신비스런 느낌과 함께 선의의 사람들로 묘사된 것을 느끼게 된다. 일부 지식층 사이에서 중국이나 일본은 신비의 대상으로 또는 이상 사회의 모범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이런 좋은 이미지는 오래 가지 않는다. 특히 서양 각국이 다투어 동양에 침입하여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19세기 후반의 신식민지시대 또는 신제국주의 시대가 되면서 서양 사람들은 중국과 동양을 깔보기 시 작했다. 칼 마르크스 같은 학자들이 중국의 경우 자기의 역사발전 틀에 맞지 않는다 하여 ‘동양적 예외’라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칼 비트포겔에 이어져 ‘동양적 전제’(Oriental Despotism)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트포겔이 이런 표현으로 책을 쓴 것이 50년대라는 것을 돌이켜 볼 때,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마르크스가 ‘동양적’을 말한 지 1세기 뒤임을 생각할 때, 서양의 동양 깔보기는 1세기 이상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러다가 다시 70년대부터 서양에 조금씩 동양을 되살펴 보려는 기운이 싹 트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이 우리에게 특히 느껴진 것은 아마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같은 책들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 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도 1978년에 쓴 <중국과학의 사상>이란 책에 서 현대사회는 중국의 전통 과학사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가 있다. 물론 카프라와 나의 입장은 상당히 다르지만, 중국의 과학전통 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서로 통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책들- 특히 카프라 부류의 책들- 은 수많이 쏟아져 나왔다. 서양과학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고, 그 돌파구를 동양 사상에서 구할 수 도 있으리라는 카프라류(流)의 주장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 만 이런 부류의 주장을 일본과 한국에서는 ‘신과학 운동’이라 하여 일 정한 자리를 할애하고 있다. 나는 몇 차례 글을 통해 이런 흐름의 건강하 지 못한 성격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왜 ‘옥시덴탈리즘’은 토론하지 않는가
이 ‘신과학 운동’의 유행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는 듯하자 이번에는 에 드워드 사이드의 책 같은 것들을 앞세운 오리엔탈리즘 주제가 흐르기 시 작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지적 경향은 나름대로 일리있는 전개 과정이다 . 그러나 사이드까지 포함하여 서양 사람들 내지 서양에서 내세우는 동양 관에는 동양 깔보기 전통이 또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나 는 풀이한다. 즉 서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에 대한 자신의 우월감 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은 동양의 특수성을 말하고 동양의 신비를 지적한 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상태가 바로 서양사회가 갖고 있는 동양 깔보기 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이런 ‘동양 봐주기’가 다름 아닌 ‘동양 깔보기 ’의 또다른 표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리엔탈리즘’을 말할 뿐,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을 토론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란 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련의 지적 경 향은 같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근래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를 예찬하는 경 우를 많이 보는데, 이것도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 내가 보기에는 최한기의 학문적 특징이란 다름 아닌 서양 학문의 합리 주의에 대한 매혹당함 정도에다가, 약간의 변용을 꾀하고 있거나 서양 학 문을 발췌하여 국내에 소개한 정도로 보일 뿐이지 그리 대단한 업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적 논문의 틀과 한국적 글쓰기가 서양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담론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런 주 장에 거의 대체로 동감하고 있다. 쓸데없이 주를 많이 달고, 또 그 주 가 운데에는 거의 관계도 없는 서양 문헌을 나열하는 따위의 논문 쓰기에는 나 역시 꽤 식상해 있기도 하다. 뭔가 아직 잘 모르지만, 우리 글쓰기는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더 옳을 것도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동양적’이란 문제가 서양 사 람들에게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자 동차가 세계에서 구르고, 한국의 전자제품 공장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 서 가동되고, 그리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중국인들을 발견하고 또 중국 음식점이 퍼져 있는 한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 대해 관심을 높게 가질 것 은 당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 인류의 문명에서 동양적인 것이 점점 더 서양적인 것만큼 그 중요성을 더해갈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서양에 대한 동양의 승리 따위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의 미래 문명은 기껏해야 동서양의 문명이 절충 조화되 는 선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동양이 서양을 이기고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 서양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적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견지해 나가는 것일 수도 없으리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미래 인간사회는 동양적인 것만도 아니요, 서양적인 것만도 아닌, 또하나의 ‘세계문명’을 갈고 닦아 나가 게 되리라고 전망할 따름이다.
‘동양적 특수성’을 잊어버리자
몇년 전이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 과학사가 사세휘(謝世煇)가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고, 멀지 않아 한국은 그 일본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책을 써서 한국인에게 대단한 인기를 끈 일이 있다. 오늘 유교적 전통을 경제발전과 연계시켜 말하고, 동양적 신비 속에서 근대 과학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이런 부류의 지적(知的) 경향은 모두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현 지인들의 희망 사항과 맞물려 일어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 사세휘의 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듯이 이런 생각이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동양에만 무슨 대단한 신비로운 유산 이 있을 까닭이 없다. 과학이 분석적인 방법을 넘어 종합적이고 유기체적 과학으로 바뀔 수도 없다. 과학을 보는 태도와 과학을 하는 입장이 유기 체적 관심으로 주도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태도는 오늘의 과학에 대한 실망에서 유래하는 자연적 반성일 뿐이다. 그런 태도가 꼭 동양적 전통에 서만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크게 본다면 동양과 서양이 그리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많은 역사적 이유에서 과학과 기술이 서양에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바람에 19세 기를 전후한 세상은 온통 서양이 주도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으며 지구상의 인간들이 명심할 일은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서 양 사람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 동안에 우쭐하여 생각해냈던 ‘동양적인 것의 특수성’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21세기의 세상에서 ‘동양적’이란 것은 쥐뿔도 아무 것도 없다. 과거에는 서양을 설명하기 위해 ‘동양적’ 이란 말이 필요했지만, 이제 점점 더 그런 설명의 도구는 필요가 없는 것 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