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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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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이라는 시대. 우리는 그 암흑 속에서도 절망 속에서도 견뎌남았다 .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든다.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역 사의 도도한 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르겠다고, 숱한 사람의 사 무친 한이 하늘과 땅에 그득해 쉽사리 쓰러지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 그래도 그 시대 우리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그 무엇이 있 었다는 생각이 든다.
양심선언이라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울려퍼진 그 소리는 잠자고 있던 사 람들의 양심을 때리고, 머뭇거리던 시민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떨림을 전했다. 문화공보부라는 데서 어떻게 언론을 통제했는지 밝히는 이른바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프락치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는 유시민씨 의 항소이유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의 진상 밝히기, 그리고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밝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결단…. 이런 것들이 죽 음의 세상을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양심의 울림이 되고 삶의 이정표가 되었는지…. 그 시절 우리는 마지막 양심의 보루를 그렇게 보이 지 않는 가운데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자. 과연 이 ‘문민’이라는 시대가 도덕적인 면에 서 얼마나 더 절망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것은 더 나아졌다는데, 그때보다 결코 더 도덕적이지 못하다. 상대적으로 더 민주화가 됐다고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숨이 막 혀갈 뿐이다.
당장 한보 대형비리사건을 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보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정태수씨를 비롯해 그 권력과 금융권력의 정상에 있 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알 것이다. 청와대라는 데서 일하거나 일하고 있는 사람들 상당수도 알 것이다. ‘파리 목숨’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이 정권에서 관련부처의 장·차관 정도를 한 사람은 알 것이다. 한보에서 경리관계선에서 일한 사람들, 금융권의 실무계선에서 일한 사람들, 검찰 경찰 안기부 같은 조직에서 일하는 관계직원들… 아는 사람은 숱하게 많 을 것이다.
그런데… 양심선언 하나 없는가. 그 죽음의 5공 군부시대에서도, 저 폭압 적인 6공화국에서도 끊이지 않던 양심의 절규는 왜 이 시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아아,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돈 만지고 권력맛 알면 과거에 무슨 일을 했을지라도 양심마저 마비되는가 보다.”
그렇다. 여기서 다시 진실을 깨닫는다. 돈 없고 권력없는 시민대중은 선 하다고, 그들이 다시 이 시대의 양심을 되살릴 것이라고….
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