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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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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시인·교육평론가
우리의 감각은 매우 불완전하다. 아무리 지독한 냄새를 맡았다 해도 조금 지나면 익숙해져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좀더 냄새가 지독해져야지 만 다시 냄새를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귀는 일정한 파동수 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파동수가 너무 낮은 소리나 파동수가 높은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이러한 감각의 불완전함은 어쩌면 사람이 환 경에 적응해 살기 위해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러운 곳에 살면서 모든 냄새를 늘, 모두 민감하게 느낀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또 시끄 러운 세상에 살면서 모든 파동수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면 정신착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환경에만 일방적으로 적응하여 자신이 사는 곳이 얼 마나 더럽고 시끄러운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 랴.
부패의 냄새에 익숙해졌는가
사람의 사회적 감각 역시 사람의 후각이나 청각처럼 불완전하다. 한보사 태가 연일 도하 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장영자 사 건 때에 비하면 덜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몇천억대의 금융사건, 1조에 가 까운 전두환, 노태우의 정치 비자금 사건 등을 다반사로 겪다보니 부패의 냄새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또 전에 비하면 갖고 있는 돈을 털어 쓰 는 버릇이 늘었다. 막연히 어디서 또 생기겠지 하는 생각에 별 부담 없이 돈을 털어 쓴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부패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부패에 대한 불감증이 생긴다. 남의 돈을 제돈처럼 낭비하는 습벽 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책임 없는 낭비에 대한 불감증이 생긴다. 어찌 보 면 사람이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고 달리 보면 사람이 사람이 기를 점점 포기해가는 것이다.
이렇게 부패와 무책임이 만연한 사회, 부패와 무책임에 대한 불감증이 일 반화된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이들에게 가치관을 가르치는 일이다 . 지도하던 아이들에게 ‘세상 모르는 사람’취급을 받는다는 교사들의 호소를 흔히 듣는다.
교사들은 계급·계층의 이동이 일어나던 이른바 경제개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편이다. 그 리고 성장기에 민족, 국가, 국가 발전 등으로 표현되는 이념에 깊이 젖어 들었다. 아이들은 이러한 교사 세대와 성장과정이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아이들은 계급·계층의 이동폭이 적은 사회에서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하게 정해진 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하다. 게다가 능 력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움직이는 우리 사회의 특성을 잘 알고 있 기 때문에 사회적 성취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국가, 국가발전으로 표현되는 이념에 대해서도 별로 구속력을 느끼지 않는다. 국가의 구속력이나 책임성이 현저히 약화되는 세계적 변화 추세가 반영되 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보사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와 같은 비합리성이 반복되어 노출되면서 아이들은 국가, 국가발전 등의 이념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다.
사태는 국가나 계급·계층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얼마전 어떤 처녀 선생님이 가출해서 룸살롱에 나갔던 중3 여학생을 지도하는데 애가 대뜸 “선생님은 남자와 자본 적 있어요?”하고 반문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 다고 했다. 산성의 강한 냄새에 익숙해진 아이에게 그것보다 훨씬 약한 냄새를 식별해야 한다고 강변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대도시 빈민층 지 역 학교에 있어 보면 가족의 해체 양상을 실감할 수 있다. 결손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많고 부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맞벌이로 새벽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다. 아이들이 주거하는 지 역에 거주하는 언니뻘의 여성들은 대개 매춘을 하고 산다. 그러한 환경에 서 아이들이 어떠한 성가치를 형성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중간 층으로도 이러한 사태는 확산되고 있다. 드라마 <애인>이 풍미하는 풍속 적 변화, 성의 상품화를 전면적으로 밀고 나오는 TV를 비롯한 매체들의 공세 속에서 아이들은 어떠한 성가치를 형성할 것인가? 아이들은 교사들 이 기준으로 제시하는 성가치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다.
교육자들은 난감할 뿐이다
근래 사회적으로 가장 많이 쟁점화되었던 말 중에 하나가 ‘X세대’란 말 이다. 일본에서는 ‘X세대’란 말 대신 ‘신인류’란 말을 쓰는데 ‘신인 류’란 말이 훨씬 실감난다. ‘신인류’란 말 속에는 국가권위의 약화, 계급·계층 구조의 변화, 가족제도의 내용적 변화라는 미래 현실에서 오 는 도전이 담겨 있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어떻게 계승시켜야 할 가치를 계승시켜 건강한 사회의 정체성을 창출하는가는 전적으로 기성세 대의 책임이다.
한보사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성적 방 종과 성의 상품화는 새로운 세대를 냉소적으로 만든다. 새로운 세대의 이 러한 냉소적 태도는 계승시켜야 할 가치의 계승을 어렵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한보부도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사태를 앞에 두고 사회적 정체성 창출의 책무를 지고 있는 교육자들은 오로지 난 감할 뿐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