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2월20일 제 145호 한겨레21

한보 수사 ‘피라미’만 잡힌다

(사진/최병국 대검 중수부장의 기자회견. 그는 세간에 나도는 설들에 대해 "전혀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지난 91년 구정을 보름 남짓 앞두고 수서사건이 터졌을 때 야당과 일부 언론은‘단군 이래 최대 의혹사건’이라며 조속한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열흘 이상 머뭇거린 끝에 대검 중수부가 수사에 나섰고 청와대 장병조 비 서관과 여야 국회의원 5명을 구속하면서 수사가 마무리됐다. 그러다가 정 권이 바뀐 뒤인 95년 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에서 정태수 한보그 룹 회장이 수서사건 전에 노 대통령에게 직접 2백억여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정태수 회장, 벌써 입맞췄을까

그리고 97년 또다시 설을 보름 남짓 앞두고 한보특혜의혹사건이 터졌고 야당은 또한번 `‘단군 이래 최대 의혹사건’이라 불렀다. 일주일 정도 지난 뒤 대검 중수부가 수사에 나섰다. 수서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의혹의 대상에 청와대가 포함돼 있다. 표면에 나타난 것만 거칠게 보면 `‘구정 ’의 명칭이 `‘설’로 바뀌었다는 것 외에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진상은 무엇이며 검찰의 수사는 어떨까. 과연 니체의 말처럼 역사는 영원 히 되풀이되기만 하는 걸까.

검찰이 수사에 나선 뒤 열흘 가까이 돼가는 2월3일 현재까지 검찰의 수사 는 시작단계에서 크게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벌써 여야 국회의원, 청와대 경제수석실·재경원·은감원·통산부 등 정 ·관계 고위급 인사 중에 누구누구가 관련돼 있는지에 쏠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나도는 `‘설’들은 대통령 가족의 이름까지도 들먹거리고 있다.

최병국 대검 중수부장은 세간에 나도는 `‘설’들에 대해 “전혀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유언비어를 따라다니다 보면 수사가 미로에 빠진다는 것이다.

정·관계의 뇌물수수 의혹에 다가설 단서로 검찰은 역시 한보그룹의 비자 금 행방을 들고 있다. 한보그룹 비자금 운용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아울러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의 입을 열게 하는 데도 상당한 공 을 들이고 있다. 3일까지 정 회장의 진술태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지 만 검찰은 구체적인 단서를 가지고 추궁해 물꼬만 트면 그때부터는 달라 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검찰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속은 타들어가고 있는 듯 다른 어느 사건 수사 때와 달리 김기수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뇌급 간부들은 수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뇌물사건이 계좌추적으로 시작해 끝난 경우는 없다. 항상 단서는 돈준 사 람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정 회장은 입이 무겁기로 유명하다. 정·재계에 는 정 회장 돈은 받아도 괜찮다는 보증수표가 찍혀 있다는 말도 있다.

수사사건 때도 그랬다. 검찰은 비자금 장부를 찾지 못했고 달리 비자금의 실체에 다가갈 단서도 확보하지 못한 채 정 회장이 돈줬다고 진술한 정· 관계 인사들을 잡아들여 자백을 받아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수서사건 당시 정 회장이 검찰에 출두하기 전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검찰 수사가 끝난 뒤 검찰 주변에서는 이 이틀 사이에 노 대통령의 측근이 정 회장이 묵고 있던 신라호텔로 정 회 장을 찾아가 입을 맞췄다는 말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나돌았다.

이번에도 야당에서는 권력 주변의 누군가가 정 회장과 진술의 폭에 대해 입을 맞췄거나 맞추려 한다는 의혹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정권은 짧고 뇌물은 길다?

(사진/"대어는 못 잡는가." 결국 `피라미'들만 검찰의 그물에 걸릴 것이라는 게 이번 수사를 보는 검찰 주변의 시각이다. 구속되는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

물론 이런 시각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입을 맞출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이 주체는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을 뿐 아니라 사태의 전말을 다 알고 있어 야 한다. 아니라면 입을 맞출 수 있는 범위가 고작해야 `‘검찰에서 진실 대로 말해달라’는 정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의혹 자체는 확인되 지 않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악의적일 수 있다. 또 수서사건 때와 달리 지금은 권력 말기라는 점을 들어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라도 정 회장과 입을 맞추기 어렵다고 관측하는 입장도 있다. 정 회장으로서는 권력은 유한해도 뇌물은 무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즉 지금 누구누구에게 뇌물을 줬다고 부느니 입 다물고 있으면서 정 회장 돈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감을 유지한 뒤 다음 정권 때 유관 부처의 정·관계 인사들에게 다시 돈을 뿌리는 것이 스스로 살아나는 데 더 도움 이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리만 가지고 사안을 예측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검찰로서 정 회 장의 입 외에 한보와 정·관계 커넥션을 밝힐 이렇다 할 단서가 부족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검찰은 약간의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여론의 기대를 얼마만 큼 만족시킬지는 모르지만 검찰로서는 할 만큼 했다는 모습을 보일 수 있 다는 것으로 보인다.

“설 전에는 몰라도 2월 말까지는 수사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물 론 수사대상은 정·관계 뇌물수수 여부를 비롯한 이 사건의 의혹 전부이 다.” 의혹의 핵심이 오래 전부터 정·관계에 가 있음을 감안하면 중수부 관계자의 이런 말에는 정·관계 인사 몇명의 수뢰사실은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여론의 기대를 얼마만큼 만족시킬까. 또 다음 정권에서 이 사건이 다시 문제되지 않도록 할 수 있 을까.

검찰에서 상당기간 근무한 중견 검사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낙관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만약 검찰에게서 정말 최대한으로 진실에 접근하는 수사를 요구한다면 이른 시일 안에 수사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록히드사건에서 일본이 다나카 전 수상을 기소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다. 계좌추적이 말이 쉬워 계좌추적이지 이런 방대한 사건에서 몇달 안에 이뤄질 수 있는가. 빨리 끝내라는 말은 결국 정태수의 입에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정이 부는 사람만 넣는 식의 수사가 바람직한가. 입맞추는 수사라 고 비판하면서 빠른 수사결과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의 정치를 보면 솔직히 답답하다. 근거도 없이 검찰이 여·야의원 들의 관여여부를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 실을 바라는 태도인지 의심스럽다. 만약 검찰 수사가 6개월 이상 걸린다 고 한다면 청와대든, 야당이든 수사하라는 말 안 했을 것이다. 빨리 불을 꺼야 한다는, 또는 틈을 주지 않고 공세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는 정치적 계산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이는 수사팀 밖에 있는 검사들의 얘기다. 이번 수사와 관련해 검찰 수뇌부와 청와대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일단 수사가 시작된 뒤에는 수사를 둘러싼 정치적 변수들 외에 수 사 자체의 논리가 큰 변수로 작용한다. 다만 그 영향력의 우선순위가 어 떻게 되느냐가 문제다.


‘꼬리’도 자르기 힘들다

검찰은 절대로 못믿을 존재라는 시각에서 검찰은 결국 도마뱀의 꼬리만 자를 것으로 예상할 수 있으나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려 해도 꼬리에 해당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살기에 사력을 다하기 때문에 증거 없이는 자 르지 못한다. 정 회장의 마음이 변한다든가, 한보그룹 안에서 내부고발자 가 나온다든가 하면 꼬리건 몸이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자르게 될 수 도 있다.

이와 관련해 “법논리와 언론의 논리, 정치의 논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는 한 중수부 관계자의 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검찰로서는 증거와 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어차피 검찰은 얼마나 잘 하냐에 관계없이 욕먹을 수밖에 없다는 냉소가 깔려 있기도 하다.

실제로 검찰 주변에서도 이번 사건 수사는 의혹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는 비판을 받고 끝날 것이고, 정치공세가 오간 뒤 다음 정권에서 다시 도 마에 오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냉소적 견해가 많다. 검찰은 이런 두터운 냉소를 깰 수 있을까.

임범 기자/ 한겨레 사회1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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