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정수 한겨레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삼성특검의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삼성 안팎으로 위기의 신호들이 구체화되고 있다. 최근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고용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삼성전자는 기업 이미지와 기업문화 부문에서 각각 포스코와 SK에 밀려났다.

△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모습을 드러낸 이건희 삼성 회장.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삼성맨의 상징인 강한 충성심도 흔들린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는 “매일 회사에 대해 안 좋은 뉴스가 나오니까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꺼려진다”며 “한국 최고 기업에 다닌다는 프라이드가 약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입사원 교육 땐 삼성 사태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고 한다. 젊고 유능한 직원들의 이탈도 심각하다. 삼성 내부 제보도 계속 이어진다. 회사에 불미스런 일이 있어도 밖에선 철저히 침묵해온 삼성의 기업문화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경영상 타격도 심각하다. 일본의 소니가 10세대 액정표시장치(LCD) 합작생산을 위해 현 파트너인 삼성 대신 샤프와 손을 잡은 게 상징적 사건이다. 일본 언론은 “삼성이 (특검 수사로 인해) 신속한 의사결정을 못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보도하고 있다. 삼성의 사령탑인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이 소니를 눌렀다고 하지만 기술 격차가 거의 없어 순식간에 뒤집어질 수 있다”며 “사건의 영향이 최소 10년은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 인원들이 자신들 안위만 염두”

위기의 신호가 늘어날수록 삼성 전략기획실 수뇌부의 대응 방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IGM세계경영연구원이 최고경영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세계 초우량 기업답지 않게 비상식적 대응”이라는 응답이 57%나 됐다. 이미 드러난 범죄 혐의에 대해서도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삼성의 컨트롤타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늘고 있다. 입사 30년째인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전략기획실의 핵심 임원들이 회사는 뒷전인 채 자신들 안위만 염두에 두고 근시안적으로 대응해서 더 깊은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며 “이를 보고만 있는 이건희 회장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나 전략기획실을 향해서는 입도 뻥긋 못하던 삼성문화로 보면 큰 변화다.

“은폐, 변명, 미숙한 언론 대응 등이 위기의 충격을 가중시킨다. … 실상을 정직하게 공개하는 것이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고 피해를 최소화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펴낸 ‘돌발사태와 기업의 위기대응’이라는 보고서 내용이다. 보고서는 2000년 6월 일본 유키지루시유업의 식중독 사고를 초기 대응 실패의 대표 사례로 꼽는다. 책임 회피에 급급한 경영진들의 거짓말이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75년간 지켜온 기업 명성이 일순간 무너졌다. 페놀 유출, 총수 일가 부정 사건 등 숱한 위기를 헤치고 재계 10위권으로 발돋움한 두산의 최고경영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한 대응을 통한 신뢰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해법을 삼성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국민에게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관련자가 확실히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개혁안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삼성 수뇌부 대응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특검에 출두해서도 혐의 부인으로 일관한다. 광범위한 증거 인멸과 조작 의혹이 끊임없이 나온다. 특검은 급기야 “삼성은 다른 기업과 달리 자신들이 국가기관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며 수사 비협조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다른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삼성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으로 대국민 사과와 기업문화·지배구조 개선안 제시, 수사 협조 등을 꼽는다. 그러나 전략기획실의 생각은 딴판이다. 한 임원은 “사건의 핵심은 차명 의심 계좌의 자금 출처와 사용처인데, 특검에서 나올 게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계열사를 통한 비자금 조성이나, 사회 유력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금품 로비를 뒷받침할 증거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전략기획실은 심지어 특검에서 차명계좌라고 시인한 삼성사회봉사단의 임원 등 4명에 대해서도 “탈루 세금만 내면 된다”고 잘라 말한다. 결국 이것이 삼성 전략기획실이 생각하는 ‘특검 시나리오’인 것이다.

크게보기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실제 특검이 열심히 수사했는데도 비자금, 로비 부분은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 시한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조차도 삼성의 ‘죄 없음’을 국민들이 납득할지는 의문이다. 삼성 임직원들조차 고개를 내젓는다. 전에 삼성 구조본에 근무했던 삼성 계열사 임원은 “최소한 이학수, 김인주 등 핵심 임원들의 사법 처리는 불가피하고, 심지어 이건희 회장이 책임져야 할 상황이 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삼성 출신으로 4대 그룹에 근무하는 한 인사는 “삼성 수뇌부가 삼성을 인질로 잡고 특검과 국민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한다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과 정몽구의 선례를 보라

삼성 해법이 더 적극적으로 모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 해법의 핵심은 잘못에 대해 책임지는 것과 새로운 삼성을 위한 변화의 노력이다. 책임과 관련해서는 삼성 수뇌부 모두를 대상으로 한 ‘공동책임론’을 생각할 수 있다. 전략기획실의 임원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전무,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모두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기업에서는 최고경영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며 “삼성과 최고경영자들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이 최고경영자들과 삼성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어, 하나를 떼어내려고 하면 나머지 하나도 함께 죽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4대 그룹의 한 인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이 회생 불능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면 사회적으로 삼성 수뇌부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한다.

대안으로는 일부가 책임지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삼성의 소유경영권 승계를 지휘해온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이 책임지는 방안이 있다. 또 하나는 이건희 회장이 직접 책임지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최선의 해법은 이 회장이 직접 나서 책임을 지면서,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총수가 절대적 권한을 갖는 재벌 체제의 특성상 이 회장이 책임을 미루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도 “이 회장이 직접 책임지고 나서는 것이 삼성 사태 해결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 때 최태원 SK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지접 책임지고 감옥까지 갔다 왔고, 결과적으로 경영권도 유지했다”고 말했다.

수뇌부의 철저한 책임, 그리고 사회적 합의

이건희 회장도 최태원, 정몽구 회장처럼 사건의 책임을 지면서도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20만 삼성 임직원들은 ‘삼성=이건희’라는 등식을 아직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다. 이 회장이 없는 삼성, 즉 삼성과 오너 체제의 분리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덜 돼 보인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용철 변호사는 “1~2%의 지분만으로 삼성을 지배하면서 회사돈을 마치 자기 것처럼 빼쓰는 불법적 오너 체제는 종식돼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부분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합의점이 삼성 수뇌부의 ‘철저한 책임’과 ‘확고한 변화의 노력’이라는 두 가지 변수의 함수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