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정착 12년만에 북녘 관광길에 성공한 김형덕씨의 여행기
북쪽 안내원들에게 “민족반역자”란 말 들었지만 진지한 대화도 나눠
▣ 김형덕/ 새터민·북한 문제 자유기고가
금강산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9살, 북한 인민군 부소대장(상사)으로 복무하던 1993년 10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베트남-홍콩으로 1년여를 떠돈 끝에 94년 9월 남한 땅에 발을 디딘 탈북자, 요즘 말로 ‘새터민’인 나는 줄곧 남북 화해와 협력을 통한 교류 확대가 평화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남북 통합의 최우선적인 방법임을 주장해왔다. 남북관계가 발전해 하루빨리 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북한으로 가는 문은 나뿐만 아니라 남한의 모든 국민에게 굳게 닫혀 있었다. 1998년 11월 북한이 금강산을 남한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본격적인 남북 교류 시대가 열렸으나 나는 7년을 망설여왔다.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기도 전에 나의 성급한 행동이 막 열매를 맺기 시작한 남북 교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름대로는 큰 마음(?)으로 이제껏 방문을 미루어온 것이다.
장인과 장모는 거듭 만류하고…
망설임 속에 7년을 보낸 나는 올여름 휴가를 가족과 함께 북쪽 땅 금강산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금강산 관광이 정상 궤도에 올랐으니 내가 북에 발을 디뎌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쪽에 와 결혼한 아내 성희(28)는 좀 걱정을 했지만, 내 판단과 식견을 신뢰했기에 금강산행에 동의했다. 두 딸 성주(5)와 영주(4)는 금강산이 어디인지 모르고 놀러간다는 말에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금강산을 밟기 2주 전 관광 신청을 해놓은 나는 사실 노심초사했다. 혹시 남쪽 정부가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면서 방북을 허용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앞선 것이다. 여행 일정이 최종 확정되기까지 여행사쪽에 신원조회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 5번이나 물어볼 정도였다. 하지만 별 문제 없이 신원조회를 통과했다.

△ 온정각 금강산 문화회관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김형덕(왼쪽에서 두 번째)씨 가족. 새터민인 김형덕씨는 7월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김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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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정착한 지 12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북녘 관광길에 오르게 된 나는 좀 들떴다. 하지만 남쪽 출신인 아내는 괜한 걱정을 계속했다. 혹시 남북 출입국사무소에서 제지당할 수 있다며 속초에 콘도를 예약해둘 정도로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금강산 여행은 시작됐다. 물론 장인과 장모님은 거듭 만류했다. 혹시라도 북한이 새터민인 나를 붙잡고 돌려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북한이 금강산에서 관광객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대한민국 국적자인 나를 억류할 경우 남북한만이 아니라 국제 인권 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에서 입장료 2억달러를 비롯해 연간 4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는 북한, 주요 외화수입원이 없는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 큰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12년 만의 귀향길은 13일 아침 시작됐다. 오전 9시 승용차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금강산 관광객의 최종 집결지인 고성군 금강산 콘도에 도착한 게 오후 1시. 신원 확인을 거치고 금강산 관광객 증명서를 발급받으니 2시30분. 버스로 갈아타고 남쪽 출입국관리소(CIQ)에 도착해 40여분을 기다린 뒤 북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북쪽의 도로 사정에 맞춰 현대아산에서 특별 주문 제작했다는 36인승 버스에 올라 비무장지대에 들어섰다. 안내원은 “북측의 출입사무소를 거쳐야 하기에 아직은 북쪽 땅에 도착한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진공상태로 빠져들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간간이 북쪽의 경비병들, 철도공사를 하고 있는 북쪽 병사들이 보였다. 검게 그을린 20대 초반의 북한 군인들은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남한 관광객에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북쪽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북한 사투리와 함께 수속이 시작되자 정말 북한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객증명서에 나는 ‘무직’이라고 썼다. 북한쪽 세관 군인이 “무직인데 어떻게 여행을 다니느냐”고 물었다. 긴장한 내가 “남쪽은 그런 경우가 많다”고 응수하자, “진짜 무직이냐”고 재차 다그쳤다. 결국 남쪽 가이드가 “남한에는 그런 일이 많다”고 가세하고서야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수속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산 호텔에 도착하는 시간은 불과 몇분이었다. 이렇게 짧은 거리를 50년이나 기다려 다녀간 실향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왔다.

△ 금강산 해수욕장에서 조개 씨뿌리기를 하는 고성항 횟집의 북한 직원들. 그들은 대부분 잦은 접촉을 한 탓인지 남한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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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가족이라도 별로 처벌 않는다”
금강산 호텔에 도착해 방 열쇠를 수령하는 것과 함께 이틀간의 관광 일정이 시작됐다. 호텔리어와 기타 종사자들은 얼굴과 옷차림이 북쪽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행동은 자연스럽고 친절했다. 눈빛도 순수했고…. 주로 2~3년제 상업·관광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더러는 출신이 평양, 일부는 고성군 출신으로 원산에서 공부했다고 했다. 금강산호텔 2층에서 북쪽식 뷔페, 12년 만에 북한에서 먹는 첫 저녁식사였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북한 특유의 담백한 음식맛은 남쪽과는 선명히 달랐다. 특히 양배추로 만든 겉절이와 볶음을 남한에서는 한동안 먹어보지 못한 터라 고향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날 밤, 호텔 인근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북쪽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들도 내 관광증에 있는 무직이라는 표시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정말 뭐하는 사람이냐?” “혹시 국정원 직원이냐?”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이냐?” 그들은 끈질기게 묻고 또 물었다. 몇년 동안 이곳에서 남한 손님을 상대했지만 북한 사정을 이렇게 소상히 아는 사람을 여태 못 봤다는 이유였다. 눈치 빠른 한 여직원이 “혹시 북쪽에서 남으로 간 사람이 아니냐”고 계속해서 물었고, 나는 결국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내심 그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에 없었다. “민족 반역자이시군요?” 그들은 나를 ‘민족 반역자’라고 불렀다. 난 “남쪽에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냐”고 물으며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서도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 탈북자들의 가족을 추방하고 괴롭히는 그런 반인권적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고 좀 자극적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북한쪽 한 직원은 ”지금은 많이 변해서 탈북자의 가족이라도 그렇게 처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우린 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서빙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남은 맥주 몇잔을 들이켜고 숙소로 돌아왔다. 12년 만에 발디딘 북녘 땅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7년 동안 참다가 나선 금강산 여행.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자 김형덕씨의 마음에 고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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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금강산 구룡연 관광에 나섰다. 두 딸과 함께 오르는 산행 코스 곳곳에서 북쪽 관리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북쪽 관리원들은 먼저 말을 걸어올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많은 남쪽 관광객을 접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법 대화의 요령도 터득하고 있었다. 함께 등반한 현대아산 직원은 산 중턱을 오르다 만난 여성 관리원이 한국방송에 소개된 적도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냐”고 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남자 관리원이 “처음부터 이러면 안 됩네다. 다음에 오면 꼭 찍어드리겠습네다”라고 가로막았다. 그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오히려 남쪽 사정을 물어오더니 “미군은 왜 남쪽에서 안 나가냐”고 물었다. 나는 “남한은 민주국가라 미군 주둔을 싫어하는 사람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남북관계가 성숙되면 남쪽 국민들도 미군 주둔의 필요성을 지금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한참을 듣고 난 남자 관리원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예로 들며 미국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했다. 우리의 논쟁은 한동안 이어졌다.
혹시 간첩은 아니냐?
남자 관리원과 얘기하는 동안 난 두 딸 성주, 영주를 쉼터에 맡겼다.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쉼터 곳곳에 북한쪽 관리원들이 배치돼 있고, 북한 사회 특유의 안정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딸애는 북쪽 안내원과 잘 놀고 있었다. 관리원들은 두돌 반 된 딸아이에게 “말도 잘하고 많이 크다”고 덕담을 해주었다.
딸들 때문에 구룡연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중도에 산을 내려오면서 마주친 북한쪽 관리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순순했고,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호텔에서 일하는 북쪽 직원들도 친절했다. 금강산 관광 중에 만난 북한 사람들 상당수는 호기심이 많았고, 남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하지만 등산로에서 만난 관리원이나 안내원들은 교과서적 체제 선전이나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북한 주민 특유의 이중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옛날 북한에 살 때는 그런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 이튿날 밤에 관람한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서커스 공연. (사진/ 김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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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 온천욕을 하고 모란봉 교예단의 서커스 공연을 관람하며 하루를 보낸 나는 고성항에 있는 한 횟집에서 둘쨋날 밤 저녁을 먹었다. 횟집 서빙은 송도특각(옛 김주석 별장)에서 파견된 20대 초반의 처녀들이 도맡았다. 식사 뒤 북한쪽 남자 직원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국내에 들어와 살고 있는 새터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정도로 남한 사람에 익숙해 있었다. 북한쪽 봉사자들은 단둘이 있으면 북한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반감을 갖고 응수하는 경우가 드물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전날 밤 들렀던 술집을 다시 찼았다. 어제 본 직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맥주 한병을 시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지도원이란 사람이 다가왔다. 자신이 이곳 술집의 여직원들을 관리하는 지도원이라고 소개한 그와 제법 말이 통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는 “혹시 (남쪽에서 온) 간첩은 아니냐”고 농담 섞인 말을 던졌다. “금강산 관광 초기부터 여기서 일했는데 선생처럼 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태연히 응수했고, 우리는 금세 자신의 월급, 가족사 등 인간적인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금강산관광 특구에 설치된 철제 울타리 때문에 답답하고, 일반 주민과 자연스러운 접촉이 차단돼 있어 북한에 왔다는 실감이 덜하다”고 넋두리하자, 그는 “그건 남측 현대아산에서 요구해 막은 것”이라고 답했다. 화제는 이리저리 돌았고, 그 지도원의 입에서 “금강산에 오는 사람 중에 부인이 아닌 애인을 데리고 오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 사람들은 돈 많은 부자냐”는 질문까지 튀어나왔다. 나는 “사람마다 생활방식이 워낙 달라 나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넘겼다. 그는 자연스레 얘기를 풀어갔다. 아마 지도원이라는 특수한 신분이 그에게 그런 자유를 주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내가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선물을 사다주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대뜸 노트북 컴퓨터를 사달라고 했다. 난 다소 놀랐다. 일반 근로자의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값비싼 물건이라,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노트북 선물은 엄두를 못 낸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여기 드나드는 남측 형님(금강산에서 일하는 남측 개인사업자)이 자신의 한달 수입이 5만달러라고 하기에 노트북 하나 사달라고 했는데, 아직 대답이 없다”면서 “다 허풍 떠는 것 아니겠냐”고 의구심을 드러냈다.
자가용을 타고 금강산에 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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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간 동안 체류한 금강산 호텔. 첫날 저녁, 2층 식당에서 12년 만에 먹은 북한 음식은 여전히 담백하여 고향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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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술집을 나서는데 어제 만났던 한 여직원이 나를 따라 나왔다. 새터민이라는 내 신분을 알고 있기에 좀 찜찜했지만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해 의자에 마주 앉았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남한에서 북조선을 반대하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조국을 위해서 행동하시라.” 물론 나 역시 “통일이 되면 하나의 조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남쪽도 북쪽도 다 조국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답했다.
다음날 아침 현대아산 직원과 함께 금강산 만물상에 오르며 현지 남쪽 근무자들의 애로, 북한 사람들의 변화를 조금은 더 읽을 수 있었다. 북한쪽 직원들과는 어느 정도 가까워졌지만 일하는 방식이 여러모로 달라 어려움이 있다는 말, 북한 주민들도 처음에는 절대로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약이나 물품을 조심스럽게 부탁하기도 한다고 그는 전했다.
하산 뒤 온정각 면세점에서 남쪽으로 가져갈 선물 꾸러미를 챙겼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30분간 휴식한 뒤 버스에 올라 다시 북한쪽 출입사무소로 향했다. 올 때와 같이 북쪽 출입사무소에서 수속을 마치고, 비무장지대를 거쳐 남쪽으로 돌아왔다. 남방한계선을 통과할 때 난 비로소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12년 만에 찾은 북한 땅,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금강산 관광은 남북 경제통합의 창구 역할을 한다는 것, 북쪽 땅에 간다는 의미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관광지로서 경쟁력은 별로 없어 보였다. 접근성이 국내 관광지에 비해 용이하지 않고 출입 절차가 외국에 나가는 것만큼이나 복잡하다. 관광지에서 소요되는 비용도 국내보다 비싸다. 위락시설 역시 교예공연 말고는 북한만의 특별함을 느낄 곳이 별로 없다.
북한을 탈출해온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남과 북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려면 남쪽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타고 출입하도록 하면 어떨까. 서울 김포공항에서 북쪽 금강산 인근 갈마비행장까지 직항로를 개설하는 것도 번거로움을 없앨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금강산콘도, 남쪽·북쪽 출입사무소 등으로 분산돼 있는 출입 절차도 한곳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남북이 비무장지대 안에 공공 출입국 시설을 설치 운영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 또 일정 조정, 연장 체류도 좀더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현재 금강산에서 하루 전에 신청하면 연장 체류가 가능하지만 비용이 비싸고 실효성은 적다. 또 금강산 온정리 인근 북한 마을 관람 코스라든지 북한만의 특수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관광상품 개발도 필요해 보였다. 나는 금강산에 만난 북한쪽 직원들에게 “올가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올가을에 다시 금강산 관광을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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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조회 다 해놓고 뒷북치다 새터민 금강산 관광 ‘실수’로 허용한 정부당국, 뒤늦게 기사삭제 요청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평소 형·동생 하며 지내던 새터민(탈북자) 김형덕(32)씨가 7월9일 금강산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고 알려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정부에서 보내준대? 북한에서 보면 배신자인데, 억류되지 않겠냐?” 나는 이런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는 약간 들떠 있었다. “신원조회 다 끝났고, 별 문제 없다는데. 정식으로 허용됐다고. 내가 탈북자 가운데 금강산 관광가는 1호라니까.”
나는 당연히 정부가 금강산 관광이 본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 김씨의 방북을 허용했다고 생각했다. 순간 ‘첫 탈북자 가족, 금강산 가족 여행기’가 뇌리를 스쳤다. 남한에 정착해 결혼하고, 5살, 4살의 두 딸을 둔 사실을 잘 아는 나는 똑 떨어지는 기삿감이라 판단했고, 글을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승락했다. 다만 “혹시 신변 안전에 문제가 될지도 모르니, 돌아올 때까지 기사를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취재원의 신변 보호, 그것도 형·동생 하는 사에에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김씨는 13일 아침 “잘 갔다 올게. 절대 그런 일 없겠지만, 혹시 북한에서 날 억류하는 일이 발생하면 제발 잘 좀 부탁해”라는 안부 전화와 함께 그는 12년 만에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난 7월19일부터 편집장과 나에게 정부 당국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요지는 “김형덕씨가 금강산 기행기를 쓴다던데, 기사를 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북한이 싫다고 탈출했던 사람이 금강산에 갔다는 사실을 북한 당국이 알면 모처럼 순풍을 탄 남북관계에 중대한 지장이 있을 수 있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 “앞으로 남한에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금강산 관광을 요청할 경우, 남북간 논란이 되고 금강산 관광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나름의 근거를 들이댔다.
난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김씨가 정부 당국이 허가해 아무 탈 없이 금강산 관광을 갔던 것 아닌가? 또 새터민의 금강산 관광을 금지할 법적 근거도, 북한과의 이면 합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김씨가 보내온 여행기도 남북 관계에 영향을 미칠 만한 대목이 없다고 판단했다. 혹여 북쪽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갈 만한 대목은 삭제하거나 고쳐 싣기로 김씨와 다 얘기가 된 뒤였다. ‘그렇다면, 결국 정부 당국이 내부적으로 불허하고 있는 새터민의 금강산 관광을 실수로 허용한 게 아닐까?’
내 의문은 곧 사실로 확인됐다. 김씨는 금강산 관광 2주 전인 지난 6월30일 금강산 관광 신청을 했다. 평소 잘 알고 있는 담당 형사에게 “금강산 가족 관광을 신청했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 통일부, 국정원 등은 그가 이미 북한 땅을 밟은 뒤에야 탈북자가 금강산에 간 사실을 알고 비상이 걸렸다. 국정원·통일부 등 관련 기관에서는 대책회의를 소집했고, 김씨가 북쪽에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또 이 문제가 남북간의 쟁점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관계자는 “신원 조회를 담당하는 경찰쪽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탈북자가 금강산 관광신청을 할 거라 상상도 못한 때문 아니겠냐”고 말했다.
정부 당국은 2박3일간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김씨에게 뒤늦게 언론 접촉 자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런 선택은 내가 한다”며 <한겨레21>에 금강산 여행기를 보내왔다. 이후 정부 당국자들은 <한겨레21>에 기사를 빼 줄 것을 요구했다. “기고문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탈북자가 금강산에 갔다왔다는 것 자체가 북한을 자극한다”는 이유와 “대북 관련 정보분석 부서에서는 7월26일부터 시작될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한겨레21>은 이런 설명에 적잖이 고민했다. 내부 토론도 거쳤다. 그러나 “새터민도 자유롭게 금강산을 관광할 자유가 있고, 정부 당국자의 실수를 언론에 전가하는 듯한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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