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알렉상드르 마트롱 지음, 김문수·김은주 옮김, 그린비 펴냄, 4만5천원

‘알렉상드르 마트롱’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철학에 친숙한 독자들에게도 매우 낯선 이름이다. 라캉이나 알튀세,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은 철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흔히 듣게 되는 이름들이지만 마트롱이라는 이름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40여 년에 걸친 마트롱의 연구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방향과 지반 자체를 바꿔놓아서 이제 마트롱을 모르고서는 누구도 더 이상 스피노자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중심에는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책이 자리잡고 있다.

유럽 지배자들에게 공포의 대상

왜 이 책이 그처럼 높이 평가받는 것일까? 그것은 이 책이 지난 300여 년 동안 지속된 범신론의 속박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벗어나는 데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네덜란드의 이 유대인 철학자가 ‘사과나무의 철학자’라면, 철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범신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신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은 사람, 자연 만물에 깃들인 신성(神性)을 관조한 신비스러운 사람, 세속적 삶을 초월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 아닌가? ‘스피노자는 서양의 노자’라는 철학적 우스갯소리는 사실 스피노자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을 대표하는 문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마트롱의 책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스피노자, 정치학자 스피노자를 보여준다. 사실 스피노자가 남긴 두 권의 정치학 저작인 <신학정치론>(1670)과 <정치론>(1677)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대의 신학·정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쓴 <신학정치론>은 19~20세기 내내 <공산당 선언>이 지배 권력을 공포로 몰아넣었듯이 17~18세기에 걸쳐 유럽 군주들과 귀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 그 자체였다. 또한 <정치론>은 스피노자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 저작,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유언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치에 관한 사유가 중심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에는 가상과 미신, 갈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나 신의 모상이 아니라,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존재,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게다가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미약한 인식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의 삶 속에서 가상과 착각, 미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욕망을 하되 비합리적이고 가상적인 방식으로 욕망하는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초월적 존재자에 대한 착각,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가상, 신의 대리인들에 대한 미신과 복종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들이 수동적인 가상과 미신, 예속과 복종의 삶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

마트롱은 비할 데 없이 엄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스피노자의 성숙기 철학을 관통하는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입증하며, 더 나아가 <윤리학>과 <정치론>에서 이 물음에 대한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변이 제시돼 있음을 보여준다. 마트롱이 이룩한 업적의 핵심은, 이처럼 두 권의 정치학 저작(<신학정치론>과 <정치론>)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집약하는 <윤리학>에서도 사회적 관계에 관한 분석이 근본 주제임을 엄밀히 논증했다는 데 있다.

스피노자를 전공하는 역자들의 값진 노력 덕분에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침이 돼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