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기획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10월04일 제679호
[재미있는 뇌] 뇌 속엔 스토리가 너무도 많아

<레인맨>의 서번트,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 지우기… 영화 속에 나타나는 뇌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naver.com

톰 크루즈와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한 <레인맨>에는 자폐증 형을 둔 망나니 동생이 나온다. 형이 그저 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동생은, 형에게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화번호부건, 카지노의 카드건 모두 순서대로 완벽하게 외운다는 것이다. 동생은 그 재능을 이용하여 도박에서 돈을 딸 궁리를 한다.

천재와 바보, 한 끗 차이

카드의 순서를 모조리 외우는 것이 꼭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기 도박사들은 철저한 노력과 집중력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0부터 9까지의 숫자에 이미지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백 자리 이상의 숫자를 완벽하게 기억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두뇌는 훈련에 따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은 괴로운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하지만 사랑의 느낌은 여전하다. 기억만이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인맨>의 주인공처럼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우는 것은 훈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서번트(savant)라고 부른다. 자폐증 등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경우다. 어떤 서번트는 1978년 12월2일은 무슨 요일? 이라고 물어보면 바로 답을 한다. 그는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한다. 어떤 서번트는 몇 분 동안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지켜본 다음,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다. 모든 세부까지 정확하게.

서번트의 뇌를 조사한 과학자들은 그들의 뇌량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뇌량은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여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 서번트는 뇌량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탓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지만 보통 사람과 같은 일상생활은 곤란을 느낀다. 한 실험에서 보통 사람들의 뇌량에 자극을 주어 기능을 약화시키자, 천재적인 능력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서번트를 보면, 천재는 일상에 서투르다, 라는 속설이 맞는 것 같다. 뉴턴이 회중시계를 계란으로 알고 삶았다던가,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에는 바보라고 불렸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천재들이 정신분열증을 앓는 경우도 많이 있다. 서번트가 일종의 자폐증인 것과는 반대라고 할수 있다. 자폐증이 나와 세계 사이에 확고한 벽을 쌓는 것이라면, 정신분열증은 나와 세계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나와 세계는 투명한 막으로 분리되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엄연히 독립된 존재이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 막이 사라지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이 곧 나의 일이다. TV에 나오는 말이 자신에게 던지는 말로 들리고,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뒤쫓는 감시자가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농담이나 별 거 아닌 말로 치부할 것도,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암호나 의미가 담긴 신호라고 생각한다.

천재 수학자 내쉬의 일대기를 그린 <뷰티풀 마인드>에는 대학 시절부터 내쉬와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가 나온다. 알고 보니 그는 내쉬의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환영이었다. 적국의 암호를 푸는 작업에도 참여했던 내쉬는 차츰 정신분열이 심해져 일상 생활을 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앤서니 홉킨스와 기네스 팰트로가 모녀 수학자로 나오는 <프루프>에서도 정신분열증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천재적인 수학자로 존경받던 로버트는 십여 년 이상을 정신분열증으로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 같은 대학 수학과에 진학한 캐서린은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 자신도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아버지 못지않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바로 그 재능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억지 같고 썰렁한 다중인격 이야기

때로 우리의 뇌는 기이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사이코>에서 온순하고 착해 보이던 남자는 사실 끔찍한 살인자로 밝혀진다. 강압적인 어머니에게 받은 정신적 상처를 달래기 위해, 죽은 어머니의 인격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창조해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현실 도피이기도 하다. 자신의 스트레스와 충동으로 범죄를 저지르지만, 범죄는 어머니가 저지른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뒤처리했을 뿐이라고 자기합리화시킨다. 그런데 <사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살인자는 기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 장면은 이중인격이 아니라 고도의 연기를 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중인격은 많은 나라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많은 인격이 동거한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뇌의 30%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점을 보면, 뇌의 다른 부분을 무엇인가가 공유한다 해도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아이덴터티>는 살인죄를 선고받아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살인자의 머릿속을 보여준다. 보통의 다중인격 영화는 다소 무책임한 면이 있다. 로버트 드 니로와 다코다 패닝이 나온 <숨바꼭질>은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지식인 남자가 실은 끔찍한 살인마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크게 설득력은 없다. 극적 반전을 위해서, 가장 친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사실은 다중인격의 살인마라는 것을 깜짝 효과로 보여줄 뿐이다. 영화가 대개 이런 방식으로 다중인격을 다루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억지 같고 썰렁해진다. 하지만 <아이덴터티>는 다중인격자의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긴장감 넘치게 보여준다.

다중인격을 연기라고 보는 사람들은, 다중인격자들은 천재라고 주장한다. 완벽하게 새로운 인격의 모든 것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태생이 러시아라면 완벽하게 러시아어를 하고, 직업이 화학자라면 화학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운동선수라면 신체적 능력까지 좋아진다. 단지 성격이 바뀌고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모두를 연기하려면, 천재적인 머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마음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어릴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기 싫어서 무의식 밑으로 감춰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트라우마에 기인한 어떤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머리는 기억을 하지 않아도 이를테면 몸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무언가가 남았다

인간은 자신이 평생 보고 들은 것을 학습하면서, 그 기억을 토대로 사고와 행동을 결정한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의 철학이다. 육체가 사라져도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영원하다는 것. <토탈 리콜>에서는 화성을 지배하는 악당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모두 바꿔버린다. 문제는 기억이 바뀐 그는, 이미 착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원래 정체가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에게 주입된 ‘착한 사람’의 기억에 따라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의 정체성은, 지금 자신에게 존재하는 기억이다.

반면 <이터널 선샤인>은 다른 식으로 이야기한다. 실연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워주는 요법이 있다. 그건 지금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뇌에 너무 많은 자극이 일어나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위해 뇌의 일부분을 제거하는 수술도 있다. 기억이나 언어에 관련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부분 마취를 시킨 뒤 환자에게 눈앞 스크린에 보이는 사물의 이름을 말하게 한다. 뇌 일부를 마비시켜도 그가 말을 하면, 그 부위는 절제해도 된다. 하여튼 그런 방식으로 <이터널 선샤인>의 남자는 실연의 기억을 지운다. 문제는, 기억을 지워도 뭔가가 남아 있다는 것. 전혀 기억에 없는 누군가를 보는데도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뇌에서 기억을 지워도, 다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 기억이 아니라도, 그 기억에 관련된 무엇인가가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