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쓴 건축자재 발견… 창덕궁 지하에도 벙커를 만들었던 불행한 역사의 흉터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게 뭘까?”
4월 중순, 서울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지으려던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직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서울 굿모닝신한증권 본점에서 찻길 하나를 건너 마주한 화단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철제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철제문은 그곳에 오랫동안 있어왔기 때문에 이곳을 자주 오가던 시민들도 문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알면서도 침묵 지키는 듯
 |

△ 여의도 벙커는 굿모닝신한증권 본점 앞에서찻길 하나 건너 마주한 화단의 쇠철문 아래 잠들어 있었다. 5월인데도 벙커 안은 초겨울 날씨처럼 서늘했다.
|
철거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일꾼들은 궁리 끝에 철제문 안에 ‘내시경’을 넣어보기로 했다. 이풍근 현장 감리단장은 “(화면을 보고)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며 “처음에는 소설책에서만 읽던 지하 비밀기지를 찾아낸 줄로 오해했다”고 말했다. 지하에 있었던 것은 2개의 화장실, 대형 대피실, 3개의 비상용 탈출구가 설치된 180평 크기의 지하 벙커였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누가, 언제, 여기에, 왜 이런 시설을 만든 것일까?
지금까지 나온 한결같은 대답은 “모른다”다. 최진호 서울시 교통개선추진단장은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고, 국방부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 군사 시설이 아니다”는 짤막한 논평을 냈다. 대통령 경호실이나 국가정보원 등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현재까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 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요인들이 대피하도록 만든 시설일 것”이라는 서울시의 추정이 가장 그럴듯한 대답이다.
그렇지만 5월10일 <한겨레21> 취재팀의 답사 결과, 현장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한 건축자재들이 발견돼 벙커가 서울시의 추정보다 훨씬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적어도 최근까지 관리돼온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상자기사 참조). 누군가는 벙커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벙커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박 대통령’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것은 박 대통령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1960년 말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숨돌릴 틈 없이 급변했다. 1968년 1월21일 북한에서 특수 산악훈련을 받은 124군 특공대원 31명이 청와대 앞산까지 침입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터졌다. 그 이틀 뒤인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납치됐고, 같은 해 11월2일에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00여명이 나타났다. 이에 맞서 박 정권은 그해 2월6일 지금은 서울경찰청으로 바뀐 서울시 경찰국에 전투경찰대를 만들었고, 4월1일에는 (38년째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을 웃고 울리는) ‘250만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벙커의 추억, 그 원조는 조선총독부
박 대통령은 그래도 불안했는지 이듬해인 1969년 1월1일 “올해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한다”는 신년사를 냈다. 이로부터 엿새 뒤 ‘원조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시 요새화 계획’이라는 걸 내놓는다. 여기서 ‘요새’란 상징적 의미에서의 ‘요새’가 아닌, 말 그대로의 ‘요새’를 뜻한다. 이를 토대로 평소에는 교통수단으로 쓰고 전쟁이 터졌을 때는 30만~40만명을 수용하는 대피소로 활용되는 남산 1·2호 터널과,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2곳에 ‘군용비행장’을 만들었다.

△ 여의도 벙커는 180평 크기에 화장실, 대피실, 비상용 탈출구등을 갖추고 있다.
|
1971년 3월 미 7사단이 철수했고, 베트남을 거쳐 라오스·캄보디아 등으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다. 전쟁의 그림자가 일상에 드리워진 때였다.
여의도광장은 그때 태어났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는 “1970년 10월 말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며 “이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1971년 2월20일에 시작해 공사비 7억6천만원, 연인원 6만7300명, 장비 1만1천대를 들여 그해 9월29일에 공사를 끝냈다. 광장의 길이는 1350m, 넓이는 12만평. 완공 이틀 뒤인 10월1일 전국의 학생과 군인 30만명을 모아 이곳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열었다. 여의도광장의 원래 이름은 ‘5·16광장’이었다.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문화재의 요새화’도 시작됐다. 같은 민족인 북한군이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향해 함부로 총과 대포를 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조처였다. 문화재 요새화의 흔적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2004년 문화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은 “서울 창덕궁 안의 방공 진지 등 전국 문화재 구역 안에 설치된 군사시설이 8곳 12만3천평이나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방송도 1976년 당시 문화공보부의 ‘충무’ 계획에 따라 창덕궁,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인 선릉, 숙종과 장희빈의 서오릉, 고종의 계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 등에 50평 안팎의 방송용 벙커 4개를 만들기도 했다(이들 벙커는 2003년께 모두 철거됐다).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던 시절, 여의도에 벙커 하나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

△ 경희궁 벙커는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듯 을씨년스럽다. 서울시는 콘크리트 구조물은 일제 시대에, 전기와 환기 시설은 1970년 이후 현대건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우리도 벙커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벙커의 추억’의 원조는 일제의 조선총독부다. 서울시 역사박물관의 뒤를 돌아 경희궁 터쪽으로 항하는 길에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우악스런 벙커가 이를 대변한다. 벙커 주변에는 청계천 복원공사 때 뜯어온 광통교 등 조선시대 돌다리 부재들이 널브러져 있다. 서울시가 2003년 작성한 ‘(경희궁) 방공호 차단벽 착굴 내부조사 결과보고’를 보면 이 벙커의 너비는 7.1m, 좌우로 뻗은 길이는 105m나 된다. 당시 학생 노역에 동원됐던 경성중(현 서울고) 학생 최준희(78)씨는 2년 전 서울시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1943년 말쯤 조선총독부 체신부 직원이 학생들을 동원해 꽤 오랜 시간 건물을 지었다”며 “일제가 통신시설을 갖춘 전시사령부로 쓰려고 이 벙커를 지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한겨레21>이 현장을 둘러보니 T자 모양으로 생긴 벙커는 2층짜리 구조물이었고, 곳곳에 사무실용 방이 20여개 있었다. 일제는 이보다 조금 규모가 작은 벙커를 서울 창덕궁에도 만들었지만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등의 지적에 따라 2003년 철거됐다.
그 지하에서 버스카드 충전한다
주변 곳곳에 남아 있는 지하 벙커들은 우리가 버텨온 세월의 엄혹함을 증언하는 삶의 흉터다. 흉터는 감추고 외면하기보다는 똑바로 응시할 때 치유할 수 있다. 1970년대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콘크리트를 부어 벙커를 만들고 땅속으로 기어 들어가려 했을까. 당시 사정을 귀로 전해듣고, 눈으로 책을 읽어 알 뿐인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해 불안감을 떨치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전쟁터가 아닌, 술자리 심복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새로 발견된 여의도 벙커는 철거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개방해 화장실과 매점 등으로 활용할 것이라 한다. 6월부터는 비상시에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려 만들었던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웃고, 차를 마시고, 버스카드를 충전할 수 있게 된다. 역사는 느린 듯 보이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조금씩 앞으로 진보해가는 것인가 보다.
 |
 | |
1992년9월30일에 마지막 점검?
 |

△ 화장실 변기 점검표에 9월30일이라는 점검 날짜가 선명하다.
|
서울시는 여의도 벙커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국군의 날 행사에 대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추정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일단, 당시 핵심 관계자가 부인한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당시 여의도 광장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다”며 “공군이 여의도를 사용하던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벙커 출입구는 영등포에서 마포대교를 잇는 도로 한가운데에 설치된 화단에 있다. 벙커가 여의도 도시계획이 끝난 뒤에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손 교수가 모른다면 재직 시절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5월10일 <한겨레21>의 현장답사 결과 벙커는 적어도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해 보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아남’ 상표의 형광등 스위치, 예비용 백열등, 화장실 변기 등은 1970년대가 아닌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것들이다. 내부 전기장치 안에서 발견된 사용 점검표의 점검 번호가 1989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89’로 시작되는 점도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더한다.
다만, 화장실 변기에 붙어 있는 점검표에는 연도 없이 ‘9월30일’이라는 점검 날짜가 적혀 있어, 10월1일 ‘국군의 날’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국군의 날 행사 장소가 서울 여의도에서 육·해·공 3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로 바뀐 것은 1993년부터다. 1993년 이전이라면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이다.
이후 여의도 광장은 1998년 조순 서울시장 때 7만평의 공원으로 개조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공사 관계자는 “나중에 개조됐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벙커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적어도 최근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  |
 |
 |
 | |
“놈들은 왕궁에까지 벙커를 지었다” [인터뷰 | ‘벙커박사’ 코털아저씨 김용훈씨]
“코털의 집. 잡인 출입금지. 대종로구청 공원녹지과 공채 상용직 백.” 일제가 서울 경희궁 터에 설치한 지하 벙커 앞에는 예전에 서울역사박물관 안내소로 쓰였던 2평 남짓 되는 간이 건물이 있다. 이 집 주인은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시설관리원 김용훈(56)씨. 그는 역사박물관과 종로구청 직원들에게 ‘코털 아저씨’로 알려졌다. 별명은 코털을 기르는데다 목소리가 크고 남의 일에 나서기를 좋아해 붙었다. 1991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다는 김씨에게 벙커에 대해 묻자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컸지만, 그의 말은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일치했다.
벙커가 언제 생겼나.
1943년 조선총독부 애들이 예전 경성중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만들었다. 부대 이름은 통신사령부라고 했던 것 같다. 옛날에 서울고 애들이 벙커 위로 난 환기통을 통해 자꾸 아래로 내려와 말썽이 심했다. 그래서 벙커 중간을 벽돌로 막았다(이 벽돌은 서울시가 2003년 5월20일 현장조사를 하면서 다시 부쉈다).
원래 이곳은 경희궁 터라는데.
맞다. 신문로에 있는 구세군빌딩 앞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있었다. 그리고 역사박물관 앞에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궁궐에는 정문을 지나 작은 개천과 다리가 하나씩 있는데, 개천은 금천, 다리는 금천교라 부른다). 이 땅을 현대건설에서 사서 아파트를 지으려 했는데 문화재 구역이라 못 지었다. 이 땅 대신에 지금 아산병원 자리의 땅을 받아 돈을 꽤 벌었을 것이다(벙커 안에는 공무부·해외플랜트부 등 옛 현대건설이 사용한 흔적이 발견됐다).
벙커 끝까지 가봤나.
벙커는 옆으로 조선총독부까지 연결돼 있다(벙커 길이는 105m로, 총독부까지 닿을 수 없다. 그는 여기서 딱 한번 틀렸다). 전쟁 나면 총독이 비밀 통로를 타고 이곳으로 이동해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했던 것 같다. 남의 나라 왕궁에 이런 것을 짓다니 나쁜 놈들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