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가 제13차 협약 당사국회의에서 ‘파격 제안’… 부시는 어떻게 기후변화 과학을 입막음하고 ‘편집’해왔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난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 외교적 허례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러니 불편한 진실을 입에 올려야겠다. 내 조국 미국이 이번 회의의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앨 고어 전 미 부통령이 제13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12월13일 열을 올렸다. 그는 “미국을 빼놓고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 협상을 한 뒤, 차기 행정부와 재논의를 하자”는 ‘파격 제안’까지 내놨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말이니 귀담아들어도 좋겠다.

△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난 9월28일 워싱턴의 미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기후변화 관련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미 하원은 최근 부시 행정부가 지난 몇 년간 조직적으로 기후변화 관련 정보를 조작해왔다고 폭로했다. (사진/ REUTERS/ JIM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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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개혁위원회의 ‘정치 개입’ 보고서
“분노와 좌절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게다. 그 분노와 좌절감이 미국을 향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년하고도 40일 뒤면, 미국에서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다. 솔직히 말해 새로 뽑힐 대통령이 내가 원하는 정책방향을 가진 인물일 거라고 확신할 순 없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질 것이란 점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린다.”
이번 발리 회의는 오는 2012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의 뒤를 이을 새로운 온실가스 규제장치 마련을 위한 초안을 작성하는 게 목적이었다. 회의 초반부터 최대 걸림돌로 떠오른 것도 자연스레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의무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규정하느냐였다.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오는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에서 25~40% 감축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미국은 회의 막판까지 “각국의 자율에 맡기자”는 주장만 반복했다.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은 1990년 기준으로 2008~2012년에 평균 5.2%의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한 교토의정서조차 무시해왔다.
각국 대표단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회의장 안팎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등 3개 기관은 12월12일 발리에서 공동성명을 내어 “기후변화는 세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과제”라며 “조속히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지구촌 식량안보를 위협하고, 기아와 영양실조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식량농업기구가 최근 내놓은 ‘2006년 식량불안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지구촌에서 기아와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은 인구는 모두 8억5400만 명에 이른다.
발리에서 미국 대표단이 ‘외로운 행보’를 이어가는 사이, 바다 건너 워싱턴 정가에선 눈길을 끌 만한 보고서가 공개됐다. 미 하원 정부개혁위원회(위원장 헨리 왁스먼 의원)가 지난 16개월 동안 파헤친 끝에 12월12일 내놓은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의 기후변화 과학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란 제목으로, 모두 37쪽 분량이다. 백악관 환경자문기구와 상무부 등을 통해 확보한 2만7천여 쪽에 이르는 문서와 두 차례의 청문회 등을 통해 확보한 증언을 바탕으로 내린 위원회의 결론은 명쾌하다. “백악관이 압력을 행사해 연방정부 소속 기후변화 관련 연구자들의 입단속을 조직적으로 해왔다”는 게다. 내용을 들여다보자.

△ ‘내일이면 늦으리.’ 제13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190개국에서 날아온 대표단이 기후변화의 ‘주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진/ REUTERS/ STRINGER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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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는 우선 지난 1998년 4월 정유업계 이익단체인 미국석유연구소(API)가 내부용으로 작성했다가 언론에 유출된 메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소 쪽은 메모에서 “평범한 시민과 언론인들이 기후변화 과학의 불확실성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교토의정서를 지지하는 세력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어 보이도록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부시 행정부는 사실상 정유업계의 이권을 위한 이 메모의 권고를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의회 증언도 상당 부분 ‘편집’
실제 위원회의 조사 결과 백악관 쪽은 연방정부 각급 연구기관 소속의 기후변화 관련 과학자들의 언론 접촉을 통제하는 한편, 연구 결과는 물론 의회 청문회 출석 자료까지 검열했다. 또 연방정부 각급 기관이 기후변화 관련 공식 보고서를 낼 때도, 초안을 미리 입수해 검토한 뒤 내용을 수정해 “기후변화의 증거가 확정적이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소속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와 허리케인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올 때마다 백악관의 승인을 받아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양대기청 공보관 출신의 켄드 레이버드는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최근까지도 백악관에 보고한 뒤에야 언론 인터뷰가 가능했다”며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한 민감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백악관 쪽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가 성사된 이후에도 백악관 쪽의 ‘사후관리’는 철저했다. 레이버드는 “인터뷰를 허락한 뒤에도 백악관 쪽에서 실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며 “심지어 기후변화가 허리케인의 강도를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높아지게 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진 과학자에게 인터뷰 승인을 해준 뒤, 뒤늦게 관점이 다른 사람을 대신 내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 이런 상황은 항공우주국(NASA) 등 다른 연구기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자들의 의회 증언 내용이 수정·편집된 사례도 발견됐다. 미 질병통제예방국(CDC) 줄리 거버딩 소장은 지난해 의회 청문회에 내기 위해 작성한 사전 답변자료에서 “기후변화는 공중보건에 심각한 우려 사항”이라고 썼다. 하지만 의회에 제출된 최종 답변자료에선 이런 내용이 삭제됐다. 지난해 7월 의회 증언에 나선 해양대기청 토머스 칼 기후자료센터장의 증언 역시 백악관 쪽이 상당 부분 ‘편집’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칼 소장은 의회에 제출할 서면 답변서를 미리 준비해 내부에서 회람시켰는데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끼친 영향은 압도적”이란 문구가 “기후변화에 인간이 끼친 영향도 있다”는 식으로 바뀐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1등석 승객은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나
부시 행정부가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성과를 조직적으로 부정하려 했다는 정황은 이미 지난 1월 말 진보적 과학자 단체인 ‘미래를 우려하는 과학자연맹’이 내놓은 자료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이 단체가 당시 7개 연방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기후변화 관련 과학자 329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46%가 ‘기후변화’ ‘지구 온난화’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말도록 압력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43%는 기후변화 관련 연구내용이 수정되거나 ‘편집’된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58%는 과거 5년간 한 차례 이상 기후변화 관련 연구 과정에서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고 답했다. 하원이 내놓은 조사 보고서의 내용이 이 단체의 설문 결과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미국은 비행기 1등석에 앉은 승객처럼 군다.” 세계적인 환경단체 ‘지구의 벗’의 토니 주니퍼 대표는 발리 회의 마지막 날인 12월14일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의 행태를 비판했다. 〈AP통신〉은 주니퍼 대표의 말을 따 “2등석에서 재난이 발생했지만, 1등석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라며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추락하게 되면 1등석 승객이든 2등석 승객이든 모두 함께 추락한다는 점을 미국은 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