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6월07일 제663호
“하드 하나 사먹고 기운 차리면 돼”

꽃 꽂은 여자와 빨간색 ‘추리닝’ 남자의 청춘 드라마 <메리대구 공방전>

▣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참으로 ‘찌질한’ 청춘의 얘기다. 꽃 꽂은 여자와 빨간색 ‘추리닝’ 바람의 남자가 등장하는, 답답한 청춘들의 드라마다.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 <메리대구 공방전>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름부터 슬프다. 황메리(이하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태어났다고 메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고 우유회사에 취직했으나 1년 만에 ‘잘렸다’. 몇 해째 백수로 지내는 메리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없다. 명랑한 메리도 어느 날엔가는 우울한 표정으로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재능도 없이 꿈만 많고”라고 고백했다. 뮤지컬 배우 지망생 메리는 오디션에 개근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배역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메리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다. “괜찮아… 하드 하나 사먹고 기운 차리면 돼”라고 털고 일어서는 낙관의 힘이 메리를 밀어간다.


재능은 없지만 열정은 정말로 대단해서 ‘필’ 받으면 “열정은 재능을 능가합니다. 기적을 낳을 수 있어요” 같은 용감한 대사도 ‘날린다’. 강대구(지현우)의 사연도 찌질하긴 마찬가지다. 역시나 이름도 슬프다. 부모님이 대구탕을 먹었던 날 밤에 그가 생겼다고 대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구는 폭탄 머리에 ‘추리닝’ 바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지만 그래도 엄연한 작가다. 무협소설 <풍운도사의 백팔번뇌>를 한 권도 아니고 두 권까지 낸 무협소설 작가다. 작가는 작가인데 무명작가이고, 소설로 누군가를 울리긴 했는데 잘못 울렸다. <풍운도사의 백팔번뇌>를 냈던 출판사 사장은 “너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면서 나와 내 가족만 울렸다”고 대구를 원망한다.

햇반 차지하기·슈퍼 취직 경쟁…

메리와 대구의 세계는 라면과 피자의 세계다. 메리와 대구의 공방전도 컵라면에 얹어주는 햇반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면서 시작됐다. 공방전 두 번째 라운드는 동네 슈퍼 취직 자리를 얻기 위한 치열한 입사 경쟁이었다. 그들은 쿠폰으로 얻은 피자 한 판에 목숨 걸고, 각자 3만원을 걸어놓고 한 사람이 ‘거덜날’ 때까지 치는 죽음의 고스톱에 매달리면서 정이 들었다. 어느새 대구는 메리를 통해서 소설의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어쩌다 서로의 흐느끼는 어깨를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사랑의 공방전이 시작될 무렵에 바른생활 사나이 선도진(이민우), 짝퉁 패리스 힐튼 같은 이소란(왕빛나)이 끼어들면서 사각관계가 형성된다. 소란은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된 집안의 딸로, 성형수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새 얼굴, 새 인생’을 꿈꾸는 소란에게는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추리닝’에 약하다는 것이다. 추리닝 바람에 이단옆차기로 대구는 치한에 시달리던 소란을 구하고, 소란은 대구의 매력에 빠졌다. 모범생으로 살아와 세상의 선도가 인생의 목표인 영어교사 선도진의 첫사랑은 다름 아닌 메리였다. 이렇게 네 사람의 ‘러브라인’이 얽히고설키면서 <메리대구 공방전>은 진행된다.

<메리대구 공방전>은 너무 진지해지면 곤란해지는 드라마다. 메리도, 대구도,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세간의 잣대로 도저히 희망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도 메리도, 대구도 희망을 잃지 않으니 일종의 판타지 성격을 적절히 유지해야 거꾸로 현실감이 생긴다. <메리대구 공방전>의 원작인 <한심남녀 공방전>이 만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터넷 소설이라는 점도 드라마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다. 메리를 연기하는 이하나는 ‘오버’하는 연기에 묘한 리얼리티를 불어넣는다. 드라마의 주인공치고는 평범한 외모인 이하나는 과장된 표정을 지어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다. 예쁜 배우들이 엽기적인 척, 평범한 척하는 연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하나가 엉뚱한 순간에 “내가 좀 예쁘긴 하지”라고 말해도, 그것은 설정을 넘어서 설득력을 얻는다.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귀여운 지PD를 연기했던 지현우의 변신도 새롭다. 귀엽고 반듯하게만 보였던 지현우의 얼굴에서 동네 백수 대구의 멍한 눈빛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동네의 ‘섹시가이’로 매력도 잃지 않는다. 빨간색 추리닝이 어울리는 지현우의 발견은 <메리대구 공방전>의 또 다른 재미다.


△ 메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만, 유난히 개들만은 메리를 따른다. ‘메리’라는 이름 덕이란다.

‘쿨한’ 연출로 공감을 불러일으켜

<메리대구 공방전>는 만화적 캐릭터에 기반하고, 무협 판타지 장면도 연출한다. 하지만 연출은 적절한 타이밍에서 과장을 끊고, 슬픔도 절제한다. 이따금 메리가 자신의 현실을 응시하면서 슬퍼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전의 쾌활한 메리로 돌아간 모습이 보인다. 감정선을 오래 끌면서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쿨한’ 연출이 메리와 대구의 일상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카메라 앵글도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모험을 선택한다. 인물을 만화의 각도처럼 잡아내는 연출이 새롭다. 여기에 <결혼하고 싶은 여자> <비밀남녀>를 썼던 김인영 작가는 인물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길어올린 인상적인 대사로 시청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예컨대 “통장 잔고가 있고, 취직해야 성장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내 안에선 뭔가가 이만큼 키가 컸을 거야”, 사랑하던 남자가 고시에 합격하고 자신의 친구와 결혼하자 메리가 했던 이런 대사는 성장통을 겪어본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메리대구 공방전>에는 조연들의 향연도 벌어진다. 이들은 어딘가 한 군데는 모자라거나 부서진 인물들이지만, 한결같이 사랑스럽다. 선도진은 명문대 출신의 교사로 잘난 남자이지만, 끝없이 바른생활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잘난 남자 선도진에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면, 밥맛 없는 이소란에게는 어딘가 귀여운 여인의 향기가 난다. 비록 졸부의 딸로 허영에 빠져 있지만, 엉뚱한 사랑에도 빠지는 순진한 구석이 소란을 <캔디>의 ‘이라이자’ 캐릭터와 다르게 만든다. 딸에게 ‘오홋 냉담’해 보이는 메리의 엄마 오성자(이혜숙), 춤바람 나서 가출한 부인을 찾으려다 춤바람이 들어버린 황제슈퍼 주인 최황제(이병준),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찍었다는 도끼병에 시달리는 메리의 친구 장은자(안연홍) 등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이 <메리대구 공방전>을 풍부하게 만든다.

티격태격이 생명, 화기애애는 위험

<메리대구 공방전>은 제목처럼 메리와 대구가 티격태격하면 재미있지만, 화기애애하기 시작하면 흥미가 떨어질 위험이 큰 드라마다. 게다가 스토리보다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드라마의 성격상, 캐릭터를 소개하는 초반부가 더욱 흥미로울 가능성이 크다. 메리와 대구의 애정전선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즈음에, <메리대구 공방전>은 어떤 저력을 보여줄까. 가끔은 외로워도 슬퍼도 메리처럼 유쾌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잊었던 낙관을 일깨우는 <메리대구 공방전>은 찌질한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