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함도 재미도 표출하기 민망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영화 <보랏>…미국에 간 카자흐스탄 기자가 좌충우돌하며 서구와 다수자의 위선을 드러내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딜레마는 이렇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지루하다.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은 재미있느냐… 하면 불편하다. 번역 제목부터 ‘골 때리는’ 영화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이하 <보랏>)는 내용도 ‘골 때린다’.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제작 카자흐스탄 정보부, 카자흐스탄TV’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하마터면 카자흐스탄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인가 오해하기 십상이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골 때리는’ 상황 때문에 ‘이것은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는 선언이로군, 생각을 바꾼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이고 어디까지가 연출인지, 헷갈린다. 이름하여 모큐멘터리(Mocumentary), 현실과 허구를 뒤섞은 영화다. 정치적으로 올바름 따위야 조롱하는 <보랏>은 이렇게 시작된다.

△ 보랏의 저 오묘한 패션은, 보랏의 황당하면서도 노골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래도 보랏은 일거수일투족에서 정치의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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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퍼붓고 나서 “여동생입니다”
카자흐스탄 기자 보랏(사샤 바론 코헨)은 정부의 ‘명’을 받고 미국으로 출동한다. 미국의 선진문화를 배워오라는 명이다. 보랏이 미국에서 각계각층의 여러분을 만나서 그들의 문화를 배우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보랏>은 스스로를 다큐멘터리라고 보이기 위해 이렇게 설정한다. 보랏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카자흐스탄 유일의 프로듀서 아자맛(켄 다비샨)도 슬쩍 소개된다. 그는 보랏의 미국행에 동행한다. 이렇게 뻔한 설정에도 자꾸만 관객은 실제가 아닐까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리얼하고 등장인물 한명한명이 실제 같은 난처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보랏은 무엇을 하느냐. 먼저, 카자흐스탄을 소개한다. <보랏> 속의 카자흐스탄은 근친상간이 만연하고, 집안에서 젖소를 키우며, 유대인 몰이를 즐기는 나라다. 처음부터 보랏은 막간다. 예컨대 보랏이 갑자기 금발의 여인에게 키스를 퍼붓고 나서, “여동생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식이다. 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화장실 유머도 서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서구가 비서구를 비문명(혹은 야만)으로 설정함으로써 서구를 유일한 문명으로 만드는 방식이라면, <보랏>은 이것을 거꾸로 전유한다. 그러니까, 카자흐스탄 촌놈인 보랏은 서구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코드를 모른다. 거꾸로 보랏은 미국에서 무엇을 해도 대충은 용서가 된다. 촌놈이 미국의 코드를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니까! 이렇게 거꾸로 선 오리엔탈리즘은 그의 죄를 사하여 주는 알리바이가 된다.
<보랏>은 서구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서 (<보랏>은 영국 출신 코미디언이 주연하는 미국 영화다) 비서구를 또다시 이용한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을 극단화해서 ‘너희가 만든 신화가 이거잖아’라고 서구의 관객들에게 환기시키는 비판의 효과도 노린다. 카자흐스탄을 극단적으로 그리는 이유도 결국은 미국을 조롱하기 위해서다. 미국 중심주의에 빠져서 지리적 지식도 없는 너네는 나름대로 중앙아시아의 문명국인 카자흐스탄을 이렇게 극악한 미개국으로 설명해도 믿을 거지? 조롱한다. 그래서 여기서 카자흐스탄은 미국인이 모르는 나라를 상징하는 일종의 가상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보랏>이 소개하는 카자흐스탄은 유대인 몰이를 마을 축제로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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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서 호모는 사형”
그리하여 보랏의 행적은 미국으로 이어진다. 보랏의 애초 계획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문화를 배우는 것이었지만, 계획을 바꿔서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LA)까지 미국을 횡단하며 여러분을 만난다. 보랏이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베이워치>에 나오는 파멜라 앤더슨에게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보랏은 아마잣에게 의도를 숨긴 채, 파멜라 앤더슨이 사는 LA로 향한다. 보랏은 (영화상 카자흐스탄 풍습대로) 그를 ‘보쌈’해서 결혼할 생각이다. 보랏은 앤더슨이 ‘순수한 여인’이라고 믿지만, 실제 미국 연예지도에서 그의 이미지는 순수함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는 1990년대 <플레이보이> 표지를 장식한 모델 출신 배우다. 이렇게 <보랏>은 무지를 무기로 미국의 코드를 마음대로 조롱한다. 보랏의 조롱에는 수순이 있는데, 불특정 다수로 출발해서 소수자로 갔다가 주류로 마무리된다. 먼저 지하철과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친밀한 행위를 해서 그들의 친절함을 시험에 들게 한다. 너희들의 친절이란 이토록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야, 조롱한다. 다음은 뉴욕, 애틀랜타, LA를 찍고 찍고 하면서 소수자들을 희화한다.
몇 개의 어록만 인용하면, 여성에 대해서는 “여자의 뇌가 다람쥐만 하다”고 설파하고, 게이들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호모는 사형에 처한다”고 자랑하며, 장애인에 대해서는 “카자흐스탄에서는 장애인(이 아니라 “저능아”라고 한다)을 우리에 가둬놓는데, 그들도 좋아한다”고 떠벌린다. 물론 맥락이 있다. 장애인 비하는 상류층 목사를 “저능아”로 조롱하기 위한 것이고, 게이들에 대한 조롱은 마초적인 미국인에게서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보랏의 유머는 소수자 자체를 희롱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소수자를 이용해서 다수자를 희롱한다. 아무리 맥락이 있어도, 불쾌할 사람은 불쾌할 것이다.

△ <보랏>이 소개하는 카자흐스탄은 유대인 몰이를 마을 축제로 즐기고(위), 근친상간과 강간이 만연한 이상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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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의 유머는 상하좌우 종횡무진하면서 결국엔 미국의 다수파를 향한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벌이는 부흥회에 찾아가 횡설수설 믿음을 고백해 그들의 신앙을 조롱한다. 로데오 경기장에서는 미국 국가의 선율에 카자흐스탄 국가 가사를 붙여서 부른다.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애국시민들은 웃다가 화낸다. 이렇게 보랏은 극단을 자처해 타인의 진심(혹은 거짓)을 폭로한다.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 여성주의자, 호모포비아를 가장해 미국인의 숨겨진 진심을 커밍아웃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들은 모종의 안도감에 빠지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발설한다.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극악해져서 타인의 악함을 폭로하는 방식이다. 역시나 불쾌하다면 불쾌할 것이다.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며 웃다
<보랏>은 보랏의, 보랏에 의한, 보랏을 위한 영화다. 보랏 역의 코헨은 실제 유대인. 하지만 극에서는 반유대주의자로 설정된다. 이런 충돌은 보랏의 유머가 만들어지는 원리다. 코헨은 를 통해서 인기를 얻은 영국 출신 코미디언이다. 보랏도 그 쇼에 나왔던 캐릭터였다. 코헨은 상황을 장악하지 않으면 웃음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을 장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2007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보랏>은 1800만달러를 들인 저예산 영화지만, 2006년 11월 전미 박스오피스 2주 연속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마도 누구는 <보랏>이 미국의 위선을 폭로해서 웃고, 누구는 <보랏>이 내뱉는 소수자 비하 발언에서 대리만족의 쾌감을 얻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딜레마는 존재한다. 벌써부터 이 땅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인간적으로 지루하다’와 동의어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유머는 위험하다는 주장도 근거가 있다. 그래서 <보랏>을 불쾌하다고 하면 지루한 놈이 되고, 재미있다고 하면 무식한 놈이 된다.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보랏>, 너는 누구냐?” 1월2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