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범죄와 싸웠던 윤정옥 정대협 전 대표, 베트남에 눈을 돌리다… 한국군 참전했던 중부지방 돌며 피해여성 만나고 온 뒤 시민연대 제안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988년 일본군 위안부 연구 ‘정신대 발자취를 따라’로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펼쳐놓은 윤정옥(81) 전 이화여대 교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초대 공동대표로 10년이 넘도록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여온 윤 전 교수의 마음 한켠에는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 글자가 있다. 바로 ‘베트남’이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이 현지 여성들을 무차별 성폭행했다는 소문은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 십수 년간 무성했다. 일본군의 만행을 파헤칠수록 윤 전 교수는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베트남 교수와의 약속, 5년만에 이루다
그랬던 그가 지난 3월15일 베트남 땅을 밟았다. 베트남 답사는 베트남의 ‘개발 중의 젠더, 가족과 환경 연구센터’(이하 젠더와 가족센터) 대표인 레 띠 남 뚜옛 교수와 총무인 팜 킴 노크씨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윤 전 교수와 뚜옛 교수의 인연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중국·일본 등 모두 9개 나라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민간 국제법정인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였던 윤 전 교수는 법정에 뚜옛 교수가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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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성폭행 피해 여성들의 마음을 풀어줘야 합니다."베트남 답사를 다녀온 윤정옥 전 교수는 진실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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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교수는 수소문 끝에 뚜옛 교수와 마주 앉았고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뚜옛 교수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베트남 답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국제법정 결과와 그동안의 연구 정리, 개인적인 일 등이 이어져 5년3개월 만에 베트남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2001년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그만뒀기에 이번 베트남 답사는 온전히 윤 전 교수 개인의 자격으로 이뤄졌으며 제자인 황점순씨가 동행했다.
베트남 꾸앙응아이, 빈딘, 푸옌, 칸호아 등 4개 성을 돌며 진행된 12일간의 베트남 답사에서 윤 전 교수는 11명의 성폭행 피해 여성을 만났다. 피해 여성들에게 들은 베트남전 한국군 성폭행의 상황은 윤 전 교수의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67살의 한 여성은 1966년 16살 때 한국군 4~5명에게 붙잡혀 성폭행을 당한 뒤 손가락을 모조리 작은 칼로 찔리는 폭행도 당했다. 올해 70살이 된 한 여성은 1966년 손이 묶이고 옷이 벗겨진 채로 여러 명의 한국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정확하게 몇 사람에게 몇 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윤 전 교수는 “그 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로 보지 못했다”며 “가해자는 내 쪽이고 그 여성은 피해자인데 마치 그 여성이 죄를 지은 것처럼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윤 전 교수는 피해 마을을 다니고 피해 여성들을 만나 증언을 들을 때마다 한국군이 이곳에서 죄 없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한 성폭행과 살상에 대해, 또 이제야 찾아온 데 대해 사죄의 뜻을 전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오랜 시간 싸워왔기에 전쟁 중에 벌어진 성범죄가 여성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베트남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전쟁 중에 일어난 성범죄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는 일생을 간다”고 말했다.
“일본에 요구했던 사항, 베트남에 그대로”
일본군 위안부와 베트남전 성폭행의 가장 큰 차이점은 2세의 문제다. 위안부는 계획적이고 제도적으로 이뤄졌지만 베트남전 성폭행은 참전 군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2세가 태어난 경우가 많다. 1969년 베트남 자잘록 마을에서 백마부대 대위로 기억하는 한국군에게 성폭행당한 한 여성은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이 여성은 1970년에 태어난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붙여서 이름을 지어줬다. 그 아들은 이제 36살이 됐다.
“한눈에도 한국인 2세임을 알 수 있었던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그저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만난 2세들은 배상보다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를 더 원했다.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일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서 당사자들이 나서 2세를 만나는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재만이라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대화를 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윤 전 교수는 베트남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일본에 요구했던 사항을 그대로 베트남에 해줘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범죄 인정 △진상 규명 △국회결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이다. “우리가 일본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얼마나 화가 났었는가. 사죄와 배상은 물론이고 심리적·의료적 피해도 보상해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고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 분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형식적이고 말뿐인 사죄였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항상 피해자 역할을 해왔기에 베트남과의 관계에서 가해자의 자리에 서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윤 전 교수는 이를 ‘의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아래서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을 나라 간의 국가주의적 관점이 아닌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윤 전 교수는 이번 베트남 답사를 다녀온 뒤 시민연대를 제안했다. 현재 15명의 발기인이 모여 시민연대 발족에 동참의 뜻을 전했다. 후원회가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윤 전 교수는 후원이 아닌 연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후원회가 되면 베트남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된다”며 “일본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라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위로금을 줬을 때 우리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올리면 왜 연대가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폭행당한 여성과 2세들에 초점
시민연대가 모양새를 갖추면 뚜옛 교수가 대표로 있는 ‘젠더와 가족센터’와 손잡고 아이들을 위해 학교 등을 지어주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 정부를 향해 소리를 낼 때 큰 구실을 해준 일본의 시민사회 단체처럼 우리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윤 전 교수는 “이미 베트남과 연대해 운동하고 있는 단체가 있지만 우리는 전쟁 중에 성폭행당한 여성과 2세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라며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도 함께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