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주) 경영권 내놓으라 선전포고… 외국자본의 재벌 지배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 발생할까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정말 무서운 일이다.” SK(주)의 2대주주 소버린이 주주제안을 통해 3월 주총에서 선임할 이사 후보를 대거 추천한 데 대해 SK그룹 관계자가 한 말이다. SK 대주주쪽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누가 감히 자산순위 4위 재벌의 경영권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소버린은 이런 틀에 박힌 생각을 단숨에 깨버렸다.

△ 지난해 11월20일 소버린의 임원 제임스 피터가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한겨레 황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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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은 지난 1월29일 주주제안을 통해 사실상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뜻을 밝혔다. 단순히 사외이사 후보뿐만 아니라, 사내이사 후보까지 추천함으로써 이사회를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참여연대가 대응 않기로 한 이유는?
소버린의 주주제안은 이사 수를 5인 이상 10인 이하로 하고, 사외이사 수를 그 절반 이상으로 한다는 내용과 함께, 사내·사외이사 5명의 명단을 담고 있다. 소버린은 SK(주)의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장악할 수 없다면 대주주와의 타협을 통해 2대주주로서 영향력을 챙기지 않고, 왜 ‘모 아니면 도’식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일까?
소버린이 크레스트 시큐러티라는 자회사를 통해 SK(주)의 주식을 사들인 것은 지난해 3월 하순이었다. 소버린은 20여일 동안 1902만여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14.99%로 높였다. 소버린이 사들인 주식의 평균 매수단가는 9300원가량이다. 소버린은 당시 주식 매입 이유를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다. 소버린의 ‘투자’는 지금까지는 대성공이다. 그사이 주가가 폭발적으로 오른 것이다. 2월7일 현재 SK(주)의 주가는 4만400원으로 소버린이 사들인 때보다 4배 이상 올랐다. 이로써 소버린은 이미 5919억원의 평가익을 올리고 있다.
SK(주)의 주가가 크게 오른 것은 기업 실적이 좋아져서가 아니다. SK(주)는 지난 한햇동안 겨우 88억원의 순익을 냈을 뿐이다. 주가 상승은 상당 부분 최대주주와 소버린 사이의 경영권 분쟁이 촉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버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SK그룹의 지배주주인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2대주주가 1대주주에게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도전한 것이다.
소액주주운동을 무기로 그동안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참여연대가 이번 3월 SK(주)의 주주총회에서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참여연대쪽은 애초 SK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정관을 개정해 항구적인 안정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보았다. 참여연대의 정관개정안은 사외이사 비율을 절반 이상으로 높이고 집중투표제를 도입해 소수주주의 이사선임권을 보장하며, 내부거래를 규율할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내부거래위원회를 신설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다. 참여연대는 또 최태원 회장, 손길승 회장, 김창근 전 구조조정본부장 등 3명의 사내이사가 등기이사에서 퇴진하되, 다만 최태원 회장이 비등기 이사로 남는 것은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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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31일 열린 SK(주) 정기주주총회에서 한 소액주주가 경영진을 질타하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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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이런 안을 가지고, 최태원 회장과 소버린 펀드의 챈들러 형제를 만났다. 이에 대해 최태원 회장쪽은 ‘고려해보겠다’고 밝혔지만, 소버린쪽은 참여연대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참여연대가 최 회장을 완전히 배제하고는 정관개정 자체가 어렵다고 본 반면, 소버린은 최 회장의 경영권 행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정관개정안 중 집중투표제의 경우 3분의 2 이상 동의가 필요한데, 양쪽의 합의가 없다면 무의미한 일”이라며 대응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주주총회에서 정면 맞대결을 한다면
소버린은 최 회장쪽과의 타협의 여지를 봉쇄했다. 그리고 주주제안을 통해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사외이사뿐만 아니라 사내이사 후보까지 발표한 것은 지배구조 개선을 넘어 경영권에 도전하겠다는 공식선언이었다. 소버린은 구체적인 사내외 이사 후보 5명의 명단까지 발표했다. 소버린은 이전부터 표대결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식지분을 분산 소유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소버린은 지난해 12월29일 보유한 주식 중 12.3%를 특수관계인 5명에게 1.99~2.89%씩 팔았다. 이는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인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즉, 감사위원인 사외이사 선임 때는 개인주주의 의결권 지분이 3%를 넘는 경우 초과 부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각각 3% 이하로 분산 보유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쪽과 소버린이 주주총회에서 정면으로 표대결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현재 최태원 회장쪽 지분은 최씨 일가와 계열사 지분을 합해 15%, 채권단 및 우호주주에게 자사주를 매각한 것을 포함하면 23.6%에 이른다. 또 우호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우리사주 지분 4.3%, 국내 금융권 기관투자가들의 지분 9.7% 등을 합하면 최대 35%가량이다. 소버린쪽은 분산 소유한 14.99%를 우선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5%가량을 보유한 템플턴자산운용쪽이 우호지분으로 알려졌을 뿐, 그 이상 우호지분의 실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태원 회장쪽이나 소버린 어느 쪽도 현재의 지분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경영권보다는 주가상승 노린다는 분석도
관심의 초점은 최근 주식을 계속해서 사들이는 외국인투자가들이다. SK(주)의 외국인 지분율은 소버린을 포함해 50.8%에 이른다. 이들 외국인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가 경영권 향방을 가름할 열쇠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지난 1월27일 SK(주) 주식 5.03%를 취득했다고 신고한 미국계 웰링턴자산운용이 주주총회에서 새로운 변수가 되고 있다. 이들 외국인이 소버린에 동조한다면 SK의 경영권이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시장의 대체적인 반응은 경영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쪽에 기울고 있다. 소버린이 경영권 획득을 진정으로 노리고 있느냐에 의문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14.99% 지분으로는 경영권을 획득하더라도 SK(주)를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경영권을 안정시키려면 소버린이 그 이상의 지분을 사들여야 하지만, 그것도 어렵다. 전 세계에 자신들의 포트폴리오를 공개해야 하는 부담을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버린이 표대결을 선언한 것은 경영권 분쟁 상황을 계속 끌고 가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만약 이번 주총에서 경영권 분쟁이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된다면 주가상승은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소버린으로서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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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재판을 받고 나오고 있다. 분식회계 파문은 소버린의 SK(주) 주식매집의 빌미가 됐다.(한겨레 강창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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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소버린이 모양 갖추기로 표대결을 선언한 것 같지는 않다. 지분을 분산 소유하는 등 사전 조처를 취한 것으로 보면, 최소한 감사위원인 사외이사는 확보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에 따르면, 최씨 일가가 감사위원인 사외이사 선임에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지분은 3% 의결권 제한 때문에 17.38%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소버린이 외국인투자자들을 조금만 끌어들이면 감사위원인 사외이사는 선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소버린이 추천한 후보들 중 김준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남대우 전 한국가스공사 사외이사의 경우 다른 투자자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무리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쪽은 바짝 긴장해 있다. SK(주) 관계자는 최 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소버린의 요구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인다. 최 회장쪽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기업 회장을 등기이사로 올려 법적 책임을 지라는 요구에 따라 대주주가 등기이사로 올라간 것인데, 이사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소버린의 주장을 일축했다. 최대주주의 책임과 권한을 포기하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는 것이다. 최 회장쪽은 또 경영권이 소버린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로 “투자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소버린)과 기업경영을 하려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국가의 기간산업을, 투자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목적만 가진 사람들에게 넘겨주면 부작용은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쪽, 지배구조 개선 약속
최태원 회장쪽은 기업지배구조 개선 약속을 통해 주주들을 설득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 1월30일 애널리스트 및 주요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설명회(IR)에서 황두열 부회장은 이사회의 구성에서 사외이사를 과반수 이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2005년부터 시행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한 것을 앞당긴 것이다. 또 사외이사 후보 추천 자문단을 통해 엄격한 자격요건을 갖춘 사외이사 후보를 선정하겠다며, 5명의 자문단 명단도 발표했다. 이와 함께 투명거래위원회를 신설해 일정 규모 이상의 관계사간 거래를 감시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는 참여연대의 제안을 일부 수용한 것으로, 최 회장의 경영권을 지킬 수 있다면 지배구조 개선 요구는 최대한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SK의 주주총회는 3월12일 전후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번 주총에서 소버린이 SK(주)의 경영권을 확보한다면, 이는 한국 경제사에 일대 사건이 된다. 외국인들이 개별 기업을 인수한 사례는 많았지만, 사실상 지주회사 격인 기업의 경영권을, 그것도 기존 주주와 대립한 가운데 확보한 경우는 아직껏 없었다. 그러나 대체적인 예상대로 최태원 회장쪽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다고 해도, SK사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SK 관계자는 “이번 주주총회는 정면대결의 시작일 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문제는 최대주주와 2대주주간 경영권 분쟁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김상조 소장은 “경영권 분쟁이 단기적으로 주가에는 긍정적일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기업가치에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