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국민·주권이 침해당한 국가적 위기… 거친 파열음 4강 외교,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오판 잇따르는 외교·안보 사안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표류정부.’ 부표처럼 떠다니고 있다. 미세한 흔들림에도 출렁인다. 원칙도, 방향도, 내용도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 한 군데 비빌 언덕도 남아 있지 않다. 나라 안과 밖이 마찬가지다. 파국의 전조다. 정부가 표류를 멈추지 않으면, 국가도 이내 표류하게 된다. 표류하는 나라의 국민은 불행해진다. 비상한 시국이다.
‘홀대’를 넘어선 ‘비례’ 보인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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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동맹으로 올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둘러싼 촛불시위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까지. 이명박 정부 5개월여, 외교·안보 분야에서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사진 위부터 한겨레 김진수·김종수·강창광·한겨레21 박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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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다섯 달여, 이명박 정부에 외교·안보 정책은 없다. 4강외교는 거친 파열음을 내고 있고, 남북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은 송두리째 실종됐고, 정무적 판단착오도 되풀이되고 있다. 한 국방·안보 전문가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근대국가가 출범한 이후 국가의 3대 구성요소는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독도 문제로 영토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과정에서 검역 주권을 침해당했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국민이 피격당하는 불행한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충격의 강도는 약하다. 하지만 그 성격은 가히 경악할 만하다. 국가 차원의 위기의식을 느껴야 할 때다.”
경고음은 전방위적으로 들려온다. 한-미 동맹을 ‘복원’하겠다던 정부가 들어선 뒤, 한-미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국민의 반미 감정도 극에 달해 있다. 섣부른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으로 국민의 분노가 촛불로 타오른 탓이다. 외통수로 몰렸음에도 ‘재협상만은 안 된다’고 버텼으니, “동맹을 위해 국민을 버렸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동맹이 강화된 것도 아니다. 되레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답방 일정은 일방적으로 연기됐고, 지난 6월21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워싱턴에서 받아와 공개한 ‘추가 협상’ 문건에는 관련 당국자의 서명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합의한 것조차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동맹, 그런 동맹이 신뢰를 얻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더욱 기막히다.
과도한 한-미 동맹 강조는 주변국의 빈축을 샀다. 한-중 관계에 찬바람이 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지난 5월27일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 군사동맹은 역사적인 산물이며, 냉전시대의 군사동맹으로 현대 세계의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 대변인은 이틀 뒤인 5월29일 앞선 자신의 발언이 “계통을 밟아 이뤄진 (중국 외교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명토를 박았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행태다. ‘홀대’를 넘어선, 의도성마저 엿보이는 ‘비례’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는 첫걸음부터 꼬였다. 취임 뒤 첫 국경일이었던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이 대통령은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4월20일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도쿄를 방문해서도 “과거 마음 상한 일 가지고 미래를 살 수는 없다”며 “일본에 대해 만날 사과하라고만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일본 우파의 ‘도발’에 빌미를 제공한 꼴이니, “독도 문제로 흔들리는 한-일 관계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비판이 과하지 않다.
뜬금없는 ‘북한 국민소득 3천달러’ 구호
러시아와는 정상회담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 확대 정상회의 기간 중인 지난 7월9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잠시 조우했을 뿐이다. 일부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전 대통령이 지난 4월 말로 예정된 퇴임 전 정상회담을 제안했으나, 우리 쪽이 한-미 정상회담에 집중하느라 시기를 놓친 것에 대해 러시아 쪽이 반감을 품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주변 4강외교가 모두 이 모양이다.
남북관계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취임 전부터 대책 없이 초강경 기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게 화를 키웠다. ‘비핵개방3000’으로 대표되는 설익은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무시를 당하고 있다. ‘비핵’은 남한이 주도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개방’은 북한이 선택할 일이다. ‘북한 1인당 국민소득 3천달러’란 구호는 정체부터 불분명하다. 1970년대 말부터만 따져도 30년 세월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천달러를 넘어선 게 최근이다. 공약이나 구호라면 몰라도 ‘비핵개방3000’이 정책목표가 될 순 없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11일 뒤늦게 ‘대화’를 제안했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란 ‘악재’와 겹치고 말았다.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게 뻔하다.
시스템 부재도 심각하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는 차관급인 외교안보수석이 대외전략·외교·국방·통일비서관을 지휘하는 구조로 돼 있다. 선거캠프 출신인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비서관은 각각 해당 부처에서 파견됐다.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청와대와 각 부처 사이에 유기적인 업무 협조 체제가 마련될 수도 있다. 문제는 성격이 다른 이들 부처가 내놓는 정책과제를 교차 점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부처에서 파견된 비서관들은 태생적으로 청와대 근무가 끝나면 돌아갈 ‘친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범정부 차원의 정책을 내놓기보다는 소속 부처의 입장을 청와대에 옮기는 일에 주력하게 된다. 대통령의 정책 결심을 지원해야 할 비서관들이 자기 부서 장관만 바라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참여정부에서 외교·안보 비서관 진용을 전략·정책·정보·위기관리 등 4가지 기능에 따라 나눠 운용한 것도 기실 이 때문이다.
외교안보수석의 낮은 위상도 난맥상을 증폭시킨다. 차관급인 현 체제에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할 수 없다. 중요한 외교·안보 현안이 발생하더라도 대통령실장을 거쳐 보고를 해야 한다. 지리학자 출신인 전임 류우익 실장도, 행정학자 출신인 현 정정길 실장도 외교·안보 정책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게다가 돌발 상황 관리 기능도 대통령실장 직속 체제로 바꿔놨다. 상황관리실은 국가 재난 사태와 외교·안보 관련 위기 상황 등을 24시간 모니터하는 국가 정보의 중추신경이다. 군·경찰·국정원의 정보가 이곳으로 모인다. 사실상 외교안보수석의 정보 루트가 차단돼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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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강 외교, 실용적으로 푸셨나요?>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이어진 한-일, 한-중 정상회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짧은 만남까지. 정상외교는 숨가빴지만, 이명박 정부의 4강 외교는 지독한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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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회의 내 외교부 독주 시대
참여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대체한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이하 조정회의)의 ‘편향성’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외교·안보 관련 장관급 협의체인 조정회의에는 모두 6명이 참가한다. 의장을 맡는 외교통상부 장관과 통일·국방부 장관, 장관급인 국무총리실장과 국가정보원장 그리고 간사 역할을 맡는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그들이다. 면면을 따져보자.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외무고시 7회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유 장관과 외시 동기다. 조중표 국무총리실장이 외시 8회,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이 외시 10회다. 김성호 국정원장은 검찰 출신이고, 이상희 국방장관은 합참의장을 지낸 정통 군 출신이다. 사실상 외무고시 7~10회 4명이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할 수밖에 없도록 짜인 구조인 게다. 가히 ‘외교부 독주 시대’라 부를 만하다.
여기에 ‘정무 기능’마저 마비 상태다. 외교·안보 관련 사안에서 오판이 잇따르고 있다. 쌀·비료 지원이 급하니 밀어붙이면 북한이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판단착오가 작금의 남북관계를 불렀다. 미 의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연내에 비준하리라는 예상은 애초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상하 양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한-미 FTA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쇠고기 수입 개방에 덜컥 합의해 후폭풍을 불렀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때도 마찬가지다. 불행한 사건에 대한 언급도 없이 ‘대승적’으로 대화를 제의했다가,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신뢰가 쌓일 리 없다. 4강외교에, 남북관계에, 외교·안보 시스템에 정무적 판단까지 오작동은 이어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원인을 3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첫째, 잘못된 분석과 판단에 근거해 있다. 앞선 정권을 좌파·반미·친북으로 보고 있다. 국내 정책 측면에서 약간의 공공성을 높인 것을 좌파로 밀어붙였다. 일방적이던 동맹관계에 약간의 균형감을 주려는 노력을 반미로 몰아세웠다. 적대의 역사를 걷어내기 위한 노력은 친북이라 매도했다. 그러곤 한꺼번에 과거로 되돌리려 했다.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둘째, 멀쩡한 한-미 동맹을 ‘복원’하겠다고 나섰다. 파탄났다고 봤기 때문이다. 동맹이 파탄났다면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FTA, 6자회담 등이 가능했겠나? 선거 때야 보수층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하려 했겠지만, 집권 이후엔 달라져야 했다. 그런데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멀쩡한 동맹을 ‘복원’하려면 뭘 해야 할까? 무기 구매와 시장 개방뿐이다. 거기서 사달이 난 게 쇠고기 문제다. 셋째, 집권 이후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은 정책을 점검했어야 했다.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이 대체 몇 년이나 끌어온 거냐. 그런데 동맹을 앞세워 그걸 덥석 받아줬다. 원칙도 없이 동맹에 ‘올인’한 탓에 국민적 반미 감정만 키웠다. 미국은 ‘합의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는 정부’라고 얕보고 있다. 동맹이 되레 약화된 이유다.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이명박 정부는 지지 기반이 없다. ‘표류정부’가 되고 만 게다.”
‘다 뒤집으면 된다’는 정치논리로
외교·안보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연속성이 유지돼야 한다. 국가 존립 기반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참여정부 핵심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인수인계 과정이 전무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10년’이란 ‘허상’ 때문이다. 앞선 두 정권의 그림자를 지우는 데 초점을 맞췄지, 그 공과 과에 대한 진지한 평가 과정이 없었다. 과거 정부가 어떤 정책 기반과 전략 방침 아래서 일을 추진했고, 성과는 뭐고 문제점은 뭔지를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오랜 고정관념과 일부 언론의 왜곡된 보도를 기초로 ‘다 뒤집으면 된다’는 정치논리가 판을 쳤다.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인수위 발족 이후 우리 쪽 비서실장이 그쪽 비서실장에게 여러 차례 인수인계를 제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2월25일부로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청와대 파견 공무원 전원에게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일부 고위 공직자는 ‘재교육 대상’으로 내몰렸다. 시스템적 측면에서도, 인적 구성 측면에서도, 외교·안보 정책의 연속성을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모든 것을 노무현과 반대로’(Anything but Roh·ABR) 하는 게 유일한 ‘독트린’이 됐다. 선거를 치르듯 정권 인수를 준비했고, 이른 시일 안에 ‘다르다’는 점을 지지세력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동맹이 복원됐음을 확인시키고, 쌀·비료 지원 문제로 북한을 압박해 남북관계를 주도하려 했다. 일본에 대해선 이전 정권과 달리 친근하게 보이려 노력했다. 눈에 띄는 성과를 위해 정상회담 일정을 빼곡히 잡았다. 외교·안보 정책은 그렇게 국내 정치용으로 전락했다. 참여정부 외교·안보팀 고위 당국자 출신의 한 인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준비가 미흡했다. 인수위 때부터 지나치게 세부적인 문제에 치중했다. 기본적으로 국가 안보정책의 큰 밑그림을 그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저 공약성 구호만 난무했다. 그마저도 철저히 타당성을 검토한 뒤 나온 게 아니라, 아이디어 수준의 얘기가 토의 과정도 없이 정책과제로 제시됐다. 대통령도 지침은 없이, 개별 사안에 대한 반응만 보였다.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근본적인 이유다.”
공약 수준의 구호를 당장 폐기하라
공약 수준의 구호가 버젓이 살아 있는 건 외부 자문그룹과의 의사소통까지 막아버린 탓이다. 이 역시 ‘ABR’의 효과다. 그러는 새 통상과 경제, 외교와 안보가 하나로 뭉뚱그려졌다. 바로 ‘자원외교’다. 하위 ‘전략 과제’의 하나가 현 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뼈대가 된 셈이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현실 인식을 진지하게 하고 나면,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도 결국 앞선 정부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선거운동 과정에서 나온 공약 수준의 구호는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빌 클린턴 전임 행정부의 모든 정책을 뒤집었던 부시 미 대통령이 임기 말 클린턴 행정부의 행보와 닮아간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