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시위대의 비판도 받고 경찰에겐 집중 견제 대상, 예비역 병장 박은수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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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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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려도 끝까지 쫓았다. 6월3일 밤 11시, 서울 광화문 앞 시위대 안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 주변을 지나던 사람이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놈 나와!” 그는 자신이 시위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몹시 흥분한 그를 사방으로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무려 20여 분, 또 다른 시민이 이제는 말리는 그를 말렸다. 혹시나 흥분한 사람이 말리는 그와 시비가 붙을까 걱정한 것이다. 만약에 ‘웅이 어멈’(sbs <웃찾사>?!)이 여기에 있었다면? “멋져부러~” 했겠다. 순한 얼굴의 사나이는 예비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에 박힌 이름은 박은수, 예비역 병장이다.
작금의 ‘시추에이션’은, 정권은 전·의경이 지키고 시민은 예비군이 지킨다? 그쯤이 되겠다. 인터넷 검색어 ‘예비군’을 치면 사진과 글들이 뜬다. 손에 손을 잡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키는 예비군, 유모차 부대를 지키는 예비군. 그러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바다는 없지만, 시민과 전경 사이엔 예비군이 있다. 예비군은 시위대의 방패를 자처하며 ‘인간 바리케이드’로 불린다. 책임엔 희생이 따른다.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다 연행된 예비군이 생기자 또 다른 예비역은 면회를 다녀와 심금을 울리는 글도 남긴다. 요컨대 “미안하다, 사랑한다.” 물론 그들은 예전엔 서로 몰랐던 사이다. 역전의 용사들이 지키는 아, 대한민국!
예비군의 배후가 있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위장해 다니던 그들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만든 배후가 있었다. 5월25일 새벽, 거리행진에 나선 시민을 경찰이 연행하자 한반도 도처에서 잠복하던 예비군이 ‘일떠섰다.’ 5월26일 다음 아고라,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대를 보호하자’는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31일, 한 줄기 예비군 물결이 거리에 흘렀다. 박은수씨도 당초엔 관망했다. 그러나 경찰의 폭력을 보고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날 예비군의 물결 속에 박씨도 있었다. 그러니까 예비군의 배후엔 경찰 폭력이 있었다.
늠름한 은수씨, 경찰과 대치한 심정을 물으니 “무서웠죠” 솔직히 답했다. 물대포는? “정말로 추웠어요.” 그래도 왜냐고? “시민이 맞을 매를 우리가 대신 맞고 싶다.” 인생에 ‘데모’란 없었던 은수씨가 군복을 입고 나온 이유다.
박수도 받지만 오해도 받는다. “때로는 프락치로 몰리고, 때로는 니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눈총도 받고, 때로는 경찰의 집중 견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웹에 올라온 군복의 하소연. 그들은 영웅이 아니다. 매서운 비판도 받는다. 웹에 올라온 ‘예비군 유감’의 한 대목. “시민들은 예비군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로 집회에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비폭력으로 책임을 다하고 있다.” 굳이 누군가 지켜줄 필요가 없다는 말씀. 한편 “군복 착용이 오히려 폭력 진압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지겹게도. 머나먼 80년대, 복학생이 예비군복 입고 막걸리 집에만 가지는 않았다. 가끔은 군복 입고 데모에도 나왔는데, 그들의 모습에 ‘경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군사주의, 남근주의, 보호논리…. 그들을 향한 끈질긴 비판은 비로소 그들의 군복을 벗겼다. 그리하여 10여 년, 집회에서 사라졌던 군복이 또다시 등장했다. 6월4일 밤 12시, 해병대복을 입은 예비역 이정인(27)·임인택(27)씨는 “군복에 대한 논란을 안다”며 “망설였지만, 위압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기 위해서 입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청년들은 안양에서 서울까지 시위대가 걱정돼 달려왔다. 군복은 선량하고, 비판도 정당하다. 어쨌든 여기는 ‘그라운드제로’다. 정권의 권위는 물론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무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