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특집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9월08일 제626호
손학규의 길을 묻다

그는 민심대장정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서민들의 희망으로 떠오를 것인가… 광주에서 진주까지 2박3일 동행기… 도인 같은 선문답 속에 진심 알아내기

▣ 진주=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길 위에 길이 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그렇게 보는 듯하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지금, 독자가 이 기사를 읽고 있는 시각에도 그는 길 위에 있거나 누구를 만나고 있을 거다. 길 위에서 길을 찾고 있는 이에게 어디로, 왜, 어떻게 갈 거냐고 묻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묻고 기록하는 직업이 기자다.


8월29일부터 2박3일 동안 그와 동행했다. 손 전 지사는 이날 오전 전남 목포에서 출발해 무안으로, 무안에서 친환경 유기농 농장에서 일한 뒤 광주로, 다시 경남 진주로 이동했다. 기자는 진주로 가는 길에 합류했다. 그동안 그의 행적이 여러 차례 언론에 소개됐기 때문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만나보니 그 이상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와 수염, 검게 그을린 얼굴…. 효자손과 우산이 삐죽 나온 가방을 둘러멘 그는 도지사가 되기 이전 국회에서 자주 봤던 ‘샌님’ 손학규가 아니었다. 거칠게 얘기하면 조금 깔끔한 노숙자 행색이었다.

‘샌님’이 조금 깔끔한 노숙자로

지난 6월30일 경기도지사 퇴임식 직후 “‘여의도 정치’와 결별하고 ‘국민의 바다’로 뛰어들겠다”며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여행객 차림이었는데, 나라 방방곡곡에 점을 찍고 다닌 60여 일(손학규의 100일 민심대장정 홈페이지(www.hq.or.kr) 참조) 동안 딴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손 전 지사는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함께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꼽힌다. 그래서 기자의 관심은 민심대장정 이후의 장기 구상에 가 있었다. 퇴임사에서 “경기도를 땀으로 적셨듯이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고 싶다”고 에둘러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던 그가 민심대장정을 거치면서 어떤 그림을 구체화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진주의 한 염색공장에서 염색을 마친 뒤 원단 포장을 하고 있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위). 8월30일 저녁엔 지난 7월 수해복구 작업을 도왔던 마호마을을 찾아 농민들의 애환을 들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날 버스 인터뷰를 포함해 염색공장 점심 시간, 대호마을 주민 간담회 이후 시간을 이용해 사흘 동안 세 번의 인터뷰를 짬짬이 했지만(인터뷰 시간을 따로 빼기 힘들다는 보좌진의 설명이 있었기에 일정 사이에 틈나는 대로 물어야 했다), 질문이 ‘여의도’를 향하기만 하면 그는 피해갔다. 허허 웃으며 “‘대’자가 들어간 얘기는 하지 말자”고 하더니, 조금 민감한 질문엔 “글쎄…” “때가 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하는 식의 단답으로 일관했다. 답변의 길이와 질문의 민감도는 정확하게 반비례했다. 대신 그는 민심대장정과 자신이 희망하는 정치, 대통령상에 대한 설명에는 긴 시간을 할애했다.

“거의 예외 없이 희망을 달라는 얘기를 한다. 오늘 어려운 것은 견디겠는데 내일의 희망이 없다는 데에 더 절망하는 거다. 절망은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까지 옮겨갔다. 정치에 대해서는 냉대나 불신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좌절하고 있고…. 서민 생활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농민·어민·노동자·광부·영세상인들과 같이 일하고 낮은 자세로 얘기를 듣고 그분들 집이나 마을회관에서 자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몰랐을까.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직전에는 경기도지사를 지냈는데…. 민심대장정이 두 달을 넘어가면서 그의 진정성을 이해한다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일정이 긴 이벤트 아니냐’는 시각도 있어 물었다. 그의 답변은 담백했다. “세상이 알아주느냐 여부를 떠나 내가 세상을 제대로 보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하다.” 지지도에 영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치부 기자나 그런 데에 관심이 있지 난 별로 관심 없다”면서 “때가 되면 곡식도 영글고, 때가 되면 바람이 불고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엉뚱하게 오기도 하고, 철 지나서 태풍이 불기도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저평가 우량주’라는 평가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직 절실하지 않으니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벌써 집권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 않나. 변화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지 않을 텐데….”

여당과 야당? 지역적 차이일 뿐

대장정 이후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시간이 아직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했고, 대권 경쟁이 본격화한 것 같다고 하면 “‘대’자 들어간 얘기는 하지 말자”며 말문을 닫았다. 대선 얘기가 부담스럽냐고 물었더니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고, “지금 하는 일은 대선과 관계 없냐”고 물으니 허허 웃었다.


△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8월30일 `2기 민심대장정을 경남 진주에서 시작했다. 이제까지 농어촌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중소도시를 주로 찾는다. 손 전 지사는 염색공장에서 원단 옮기는 작업에 참여한 뒤 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인터뷰어의 문제인지 인터뷰이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주제는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때때로 양쪽의 입장이 뒤바뀌기도 했다. 손 지사는 세종대왕이 왜 성군인 줄 아느냐고 물었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아픔을 같이 느끼고 나눴기 때문이다. 측우기를 왜 만들었나. 애써 지은 농산물이 홍수에 날아가고 가뭄에는 논바닥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만들었다. 해시계를, 한글을 만들 생각도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거대담론이 아니라 백성들의 구체적인 부분, 작은 것 하나하나를 아파하고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성군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요즘 세종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는 그의 답이었다. ‘생활현장에 뿌리를 둔 실사구시’가 그의 새로운 ‘상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정치 문제가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 혹은 소통 방식의 문제라고 보는지 물었다. 오히려 기존의 정당들이 그가 만나온 서민들의 정치적 이해와 요구를 외면해왔고 정당정치가 발전하지 못한 데에 후진성이 있는 것이 아닌지 물었다. 과거와 달리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자애로운 군주상’, 백번 양보해 ‘모내기를 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농민들의 애환을 달랜 박정희’ 모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지 궁금했다.


△ 길 위에서 길을 찾고 있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수해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마호마을 곳곳을 돌아보며 주민들을 위로했다.

“사회는 엄청나게 변하는데 정치는 빠르게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체질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젠 거대담론만 갖고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 현장에 뿌리박은 정치가 돼야 한다. 전체적인 국가 이익을 고려해야지 계급·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은 어느 한 계층에 치중되고 길게 보면 오히려 그 계급·계층에 손해가 된다. 그것이 사회주의 아닌가. 처음엔 이해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결국 이데올로기밖에 남지 않는다. 이념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선진국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념적 통합이 일어난다.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에 차이가 있나. 이념적 차이가 크지 않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떤지 물었다. “지역적 차이 정도겠지.”

자신이 저항했던 박정희에 관해서는 “젊을 때는 못 봤지만 박통에게 진정성이 있었다고 본다.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한다. 그것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한 점까지는 물론 아니고…. 정치에도 부정적 유산을 남기지 않았나. 아직까지 박정희가 살아 있는데….” 그의 말이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말인지,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가 그때 뿌려진 씨앗이라는 의미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보수와 보수주의는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그는 자신을 ‘건전한 보수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런데 몇 가지 현안에 대한 그의 견해 가운데는 그가 비판해온 보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도 있었다.

회삿돈 797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횡령)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정몽구(68) 현대차그룹 회장 문제와 관련해 그는 “일선 검사와 대통령의 판단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큰 경제정의는 일자리이고 일선 검사는 사법정의를 앞세워야겠지만, 국가최고경영자는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손 전 지사는 “대통령은 국민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에 관해서도 그는 “현 정권이 반미 자주로 편을 가르고 역사를 오도하고 있다. 1980년대 종속이론을 21세기에 와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교육이나 복지 등 돈 쓸 곳이 많은데 급하지도 않은 문제를 건드려 결과적으로 국가 이익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주화 투사, 학자, 정치인 그리고…

손 전 지사는 70·80년대 민주화 투사에서 학자로, 다시 정치인으로 여러 변곡점을 거쳐왔다. 이번 민심대장정도 또 다른 의미의 변곡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정치인의 기본적인 자질이겠지만, 그는 사람들 속에서 편하고 즐거운 것 같았다. 8월30일 동행이 끝났다. 손 전 지사는 ‘손학규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 창원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체험, 고난의 행군

하루 6개의 일정 소화하는 등 ‘진정성’으로 강한 인상 남겨

8월30일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일정은 민심대장정이라기보다는 ‘고난의 행군’에 가까웠다.

이날 아침 경남 진주의 한 염색공장을 방문해 고된 일을 한 손 전 지사는 점심을 먹고 시내 중앙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외곽 쪽의 공장 방문, 대학생 간담회 이후 수해복구에 참여한 적이 있는 대호마을(진주시 대곡면 마진리)로 향했다. 주민과의 만남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까지 포함하면 모두 6개의 일정을 소화했다.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강행군이었다.

일단 사람들과 이야기판이 벌어지면 그는 수첩부터 꺼내들었다. 주로 한복에 쓰이는 실크에 염색과 가공을 하는 남양염직의 경영진은 “요새 한복을 입지 않아 한복업계 전체가 어려움이 많다”며 “정치인과 부인들이 각종 행사 때 한복을 자주 입도록 독려해달라”고 주문했다. 손 전 지사의 질문은 기술 개발과 인재 양성 등 중소기업의 애환에 집중됐다. 젊은 사람들은 오더라도 못 버티고 금방 떠나 숙련된 기술자는 40·50대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에 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공장을 둘러봤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면서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기자가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학규라고 알려줬더니 되물었다. “경기도지사가 여기까지 왜 왔어예?” 손 전 지사에게는 원단을 염색통에 넣고 빼는 일이 주어졌다. 손수레로 옮기는데 무거운 것은 50kg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1시간가량 구슬땀을 흘렸다.

중앙시장 일정은 원래 방역작업이었는데 아침에 비가 오는 바람에 취소되고 상가 번영회 간부들과의 간담회로 대체됐다. 진주도 대형마트가 생긴 이후 재래시장의 어려움이 가속화된 점은 여느 중소도시와 같았다. 인구에 따라 할인매장 수를 제한하고 영업시간을 규제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원성이 높았다. 손 전 지사는 간담회 이후 시장을 둘러봤다. 그런데 번영회 쪽의 ‘오버’ 때문에 민심대장정이 선거운동으로 바뀌어버렸다. “경기도지사를 지낸 손학규 전 지사님이 오셨습니다. 악수 한번 하이소.”

손 지사 일행은 이날 저녁 느지막이 마호마을에 도착했다. 손 전 지사가 지난 7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해복구 작업에 참여했던 곳이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60·70대 동네 노인 3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담회라기보다는 마을잔치 분위기였다. 주민들은 “지사님이 다녀가신 이후 여러 곳의 지원이 이어져 이 근방에서 가장 빨리 복구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적당히 시늉만 보이고 떠나는 정치인만 봐왔던 주민들에게, 주민들조차 민망할 정도로 몸을 던졌던 손 전 지사의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손 전 지사 쪽은 “진정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장정은 제3의 변곡점?

함백탄광 노동자에서 옥스퍼드 거쳐 경기도지사가 되기까지

내년에 환갑을 맞는 손학규(59) 전 경기 지사가 젊은 사람들에게도 벅찰 민심대장정을 버텨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젊은 날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한일회담 반대 시위,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규탄 시위 등으로 무기정학을 받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며 함백탄광에서 일했다. 1970년대 유신정권 때는 수배생활을 하면서 과수원, 철공소 등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가 유신의 종말(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맞은 곳은 경남 김해의 보안대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그는 “나는 그동안 일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너희가 해다오”라고 하면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1986~87) 재직 기간을 빼곤 공부에 전념해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선 인하대·서강대 교수가 됐다. 그의 삶의 첫 번째 변곡점이었다.

1993년 그는 두 번째 변곡점을 맞는다. 문민정부 시절,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에 현재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의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된다. 그의 옛 동지들은 재야운동을 하거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1996년 재선에 성공했고 그해 11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고, 2002년엔 경기도지사에 당선된다(<손학규와 찍새, 딱새들> 참조).

정치를 시작하기 전의 삶이 파란만장했고 정치인이 된 이후의 경력도 화려하지만, 지나온 삶만큼 주목받고 있지는 않다. 한나라당의 다른 대선주자들에 비해 지지도가 낮은 것은 인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평면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게서는 후한 평가를 받지만 그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손학규 하면 떠오르는 대표 상품이 각인되지 않은 탓이다. 민심대장정이 그의 이런 단점을 보완해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