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한겨레21

외환위기가 오고 있다

(사진/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자 환율상승으로 이어져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달러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계속 오르고 있다.)

“97년 가을 어느날. 싱그러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상쾌한 하루가 시 작됐다. 그러나 여의도 증권가에는 뭔가 유쾌하지 않은 공기가 감돌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다투어 매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오전 중 외 국인 투자자들이 팔아치운 주식은 2천억원어치에 이르렀다. 주가는 당연 히 폭락했다.


경상수지 적자 미국 이어 세계 2번째

급보를 들은 정부당국이 주요 외국투자가와 증권사에 자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매도주문은 오후에도 이어졌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 도 계속됐다. 그들은 매각한 주식대금을 달러로 바꿔 본국으로 돌려보냈 다. 불과 3일 동안 약 20억달러의 외화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외환시장에도 혼란이 빚어졌다. 외화가 빠져나가니 환율이 치솟았다. 해 외에서는 한국계 은행에 대한 신규여신이 전면 중단됐다. 그러자 정부는 외화지급정지 등 긴급대책을 마련했다. 그러고 나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일본 등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사태수습에 나섰다. 한국은행도 이 웃나라 중앙은행에 협조를 요청해 간신히 불길을 잡았다.”

혹시나 닥칠지도 모를 외환위기를 상상해 본 시나리오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이런 위기가 우리에게 절대 찾아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요즘 의 경제상황을 보면 이런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는 지난해 자그마치 2백37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사상 최대였다. 멕시코가 외환위기를 겪기 한해 전인 지난 93년의 2백34억달러 보다 3억달러 많은 것이다.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2번째로 큰 규모다. 올 해도 시원치 않다. 올 1월 30억달러의 경상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2월에 도 20억달러 안팎의 적자를 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개월 동안의 적자 만도 벌써 50억달러다.

외채도 눈사태처럼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의 총외채는 1 천30억달러 안팎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년 사이에 약 2백50억달러나 늘었다. 국내총생산의 20%를 넘은 것이다. 이 가운데 대외자산을 뺀 순외 채는 3백40억달러 가량된다. 지난 85년 3백56억달러에 도달한 이후 가장 최고치다. 지금은 아마도 4백억달러쯤 돼 있을 것이다.

외환보유액도 줄어들고 있다. 2월 말 현재 2백98억달러에 불과하다. 1백5 0억달러 안팎인 우리나라의 월간 경상지급액(수입액+무역외지급액)의 두 달치도 안 된다. 경상적자로 인한 외화자산의 감소분을 외국자본 도입으 로 메운다. 그러나 지난해의 경우 그것마저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달러 공급이 부족해지고 환율이 급등했다. 미국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은 지난해 말 844.20원에서 최근에는 875~880원으로 상승했다. 2월 중순 외 환당국이 강력하게 개입했는데도 이만큼 올랐다. 당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9백원을 웃돌지도 모른다.


“외국자본 빠진다” 환율상승 막기 전력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가 일어나면 환율은 올라가야 하거늘, 당국은 환율 상승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환율상승으 로 외국자본 유입이 잘 안 되고, 들어와 있는 외자가 떠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규모 경상적자 속에 원화의 인위적 고평가 현상 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을 보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 상황이 극도로 나빠져서 어느 순간 ‘환율의 여신’이 화를 내거나 ‘금융의 신’이 우리에게 보복을 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94년 심각한 외 환위기를 겪었던 멕시코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해 12월 멕시코는 정부가 페소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고 발표하자 외 국의 투자가들이 앞다퉈 주식과 채권을 대거 내다팔았다. 이로 말미암아 주가는 폭락하고, 페소화의 가치도 50% 이상 떨어졌다. 이에 따라 그해 3 월 2백57억달러를 헤아리던 외환보유액은 연말에는 63억달러로 줄어들었 다.

멕시코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멕시코의 정치·경제사정이 악화돼 외국투자 가들의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됐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90년대 초부터 거액의 경상수지 적자를 내고 있었다. 적자규모도 90년 75억달러에서 91 년 1백49억, 93년 2백34억달러로 늘었고, 94년에는 2백89억달러로 치솟았 다. 멕시코는 적자로 인한 외화고갈을 외국자본 도입으로 메웠다. 특히 미국달러화에 연동되는 단기국채 ‘테소보노스’를 대규모로 발행하는 등 외국의 단기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열중했다. 그 결과 외채, 특히 단기외 채가 늘어났다. 그리고 외국투자가의 신뢰 유지를 위해 페소화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했다.

게다가 94년부터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도 발효됐다. 그 결과 수입이 수출보다 빠르게 늘어났다. 남부 치아파스주의 농민반란도 한몫을 했다. 결국 멕시코의 경제력이 이런 모든 악조건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페소 화의 인위적 고평가를 보면서도 참아오던 ‘환율의 여신’도 인내의 한계 를 느끼고 ‘보복의 사자’를 보낸 것이다.

멕시코사태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어느새 우리나라의 상황을 다시금 돌 아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올해 부자나라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에 가입했다. 이에 따라 대외거래의 규제를 하나하나 없애고 있다. 때문 에 수입을 억제하기가 어려운 반면 수출환경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다. 또 계속되는 경상수지 적자로 달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모자라는 달러 를 외자도입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올해부터 상업차관과 현금차관의 도입을 허용하고 외국인의 채권투자도 개방했다. 14일에는 은행의 해외차 입 한도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멀지 않아 자본시장 자유화의 폭을 넓혀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의 유입을 확대할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유입된 달 러는 달러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원화환율의 급상승도 억제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외채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현재 1천억달러가 넘는 외 채 가운데 단기외채의 비중이 최소한 60%는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은행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최근 해외차입 자유화 조처에는 단기외채 비중을 낮춰보자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정부도 위험부 담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한보사태로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신용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이번 조처가 얼마나 효험을 발휘할지는 의 문이다. 설사 효과가 있어도 문제는 남는다. 외채가 더욱 빠르게 늘어나 고, 국내에는 통화팽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가 멕시코처럼 허약하지는 않다. 경제규모나 물가상승률, 저축률, 통화증가율 등 여러 가지 지표를 통해 볼 때 우리나라의 경제는 멕시코보다는 양호한 편이다. 멕시코는 외국에서 도입한 자본을 흥청망청 써버린 반면 우리나라는 자본재 수입 등 성장잠재력 확충에 투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걱정해 두어야 할 허점은 많다. 최근의 과소비와 무분 별한 해외여행 같은 것은 우리 경제를 좀먹고 있다. 그동안 들여온 자본 재 가운데서도 생산력 향상과는 무관한 것이 적지 않다. 현 정부 들어 유 선방송이나 지역민방 등을 마구 허가해 방송기자재의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쳐야

종합적으로 볼 때 우리가 멕시코 같은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아직 크지는 않다. 그렇지만 위기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멕시코 사태가 ‘고강도 위기’였다면, 한국은 ‘저강도 위기’인 셈이다 .

그러니 지금 안심하고 있을 때는 결코 아니다. 뭔가 대책을 세워두지 않 으면 안된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외환당국도 나름대로 대비책을 수립해 놓았다. 이를테면 연초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홍콩 등 4개국 중 앙은행과 르포(REPO)계약을 체결했다. 르포계약이란 중앙은행 보유채권을 담보로 받아두고 자본유출 사태를 겪는 나라에 외화를 빌려주는 환매조건 부 채권매매 계약을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대처방안이 아니다. 그것을 동원할 필요성이 아 예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단 일이 벌어지면 수습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경우도 위기를 겪은 직후 임금동 결이나 세금인상, 공공요금 대폭인상 같은 조처를 취한 뒤에야 회생의 실 마리를 찾았다. 그 결과 성장이 크게 둔화됨은 물론 기업부도가 잇따르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를 모으고, 절제의 미덕을 발휘할 때가 아닌가 싶다.

차기태 기자/ 한겨레 경제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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