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한겨레21

대통령의 혁명적 발상?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 신한국당 신임 대표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것 인가.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로, 정치적 상처를 입혀 퇴장시키려는 의도의 ‘버리는 카드’를 뽑아든 것인가. 김 대통령이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어 이 대표를 전격 발탁한 진의를 놓고 정치권의 관측이 구구하다.

물론 현재로서는 김 대통령의 속내를 딱히 꼬집어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 만큼 현재의 정치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유동적이며, 이 대표의 앞날 또한 온통 지뢰밭 투성이다. 이 대표 지명에 따른 다른 대선 주자들의 반발 등 신한국당 내부 갈등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과 같다.

하지만 ‘김심’이 어느 쪽이든 간에, 김 대통령의 발상이 1백80도 바뀐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물론 현철씨의 국정개입 의혹 확산, 최형우 고문의 입원 등 전혀 예기치 못했던 최근의 갑작스러운 상황전개와 무관 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 한 고위관계자의 진단은 음미해 볼 만하다. 그의 분 석을 요약하면 이렇다. “김 대통령은 이제 국정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아들 현철씨의 추문이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져가면서 권력 정당성의 요체라 할 도덕성과 효율성이 모두 사라졌다. 누군가 국가 를 운영해야 하는데 대통령은 이미 권위를 상실했다. 일종의 권력 공동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김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못 하게 된 형편이라면 당이라도 중심을 잡아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통령은 발상을 혁명적으로 바꾼 것 같다.” 이 관계자는 김 대통령이 이 대표를 기용한 것이 “순리이고 현명한 판단”이라는 평 가를 내리고 있다.

사실 김 대통령만큼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일단 힘이 한 쪽으로 쏠리기 시작하면 권력이동의 가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권 력누수의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몸으로 체득해 알고 있는 사람이 바 로 김 대통령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표 지명을 김 대통령의 ‘체념’의 결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권력의 중심이 급격히 이 대표에게 쏠리면서 앞으로 김 대통령이 섭섭한 느낌을 많이 받을 것” 이라면서 “김 대통령이 앞으로 많은 인내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일각에서는 김 대통령의 이 대표 지명을 현철씨의 처리 문제와 관련짓기 도 하지만 청와대의 기류는 사뭇 다르다. 한 고위 관계자는 “여론의 노 도와 같은 압력을 배겨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대표든 누구든 마찬가 지다. 현철씨 문제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과 같으며 정치적 절충으로 해 결될 사안도 아니다. 이 대표 지명과 현철씨 문제를 연관지어 생각할 필 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표 기용을 대선후보 조기가시화로까지 해석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 라는 의견도 물론 만만치 않다. 김 대통령이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일단 이 대표를 지명했지만, 특유의 기질상 결코 권력을 호락호락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대통령이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최대 강점이 뛰어난 위기돌파 능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 다”며 “그런 점에서 이 대표 기용은 매우 절묘한 수”라고 말했다. 즉 김 대통령이 이 대표를 지명한 것은 △밖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 도록 발목을 잡고 △정치적 역량이나 자신과의 관계 설정 등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뒤 △그 결과에 따라 최종 결심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신한국당 세력판도를 자연스럽게 ‘이회창 진영’ 대 ‘반이회창 연합’ 의 구도로 정리한 뒤 최종선택을 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많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대통령으로는 어차피 현재의 복잡한 당내 세력분포를 간결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면서 “당내 최대계파인 민주계 세력으로 캐 스팅 보트를 쥐고 최종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종구 기자/ 한겨레 정치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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