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
|---|
‘근대’ 또는 ‘현대’라는 말은 얼핏 단순하고도 자명하게 들린다. 그 러나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쪽의 담론체계에서 그 말들(사실은 그것들의 영어 단어인 `Modernity)은 매우 착잡하면서도 문제제기적이다. 근대(또는 현대)의 의미와 실상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서도 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탈현대(Post -Modernity)와 그것의 이념적 표현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땅에 상륙한 지난 80년대 이후 ‘근대’라는 개념은 더 한층 중요하고도 유의미한 화 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체의 해체, 거대담론의 무효화, 미시권력의 대 두, 실체가 아닌 이미지와 환영들의 활보, 정보화의 급속한 진행, 소비사 회적 욕망의 분출 등 탈현대의 지표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과연 구체적인 현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핵심사항이었다. 서 구의 지적·문화적 풍향 변화에 민감한 일군의 학자·문화인들이 포스트 모던의 도래를 당당히 외치는 한편에서 또다른 보수적인 이들은 그 주장 의 성급함을 지적하며 맞서는 것이 우리 지식인 사회와 문화계의 낯익은 풍경이 되었다. 이인화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를 둘러싸고 벌어진 90년대 초의 이른바 ‘혼성모방’ 논쟁은 그 두드러 진 사례일 뿐이다.
‘첨단 담론’이 시대를 갉아먹는다
지난 연말 이후 우리 사회는 또 한차례 거대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야 했다.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와 그에 대한 전 국민적 항거, 한보 부도사태와 관련 정치인들의 구속, 황장엽 망명, 대통령의 대 국민 사과담화와 개각, 그 아들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에 관한 증거들…. 숨돌릴 겨를 없이 이어지는 이 구경거리들은 신문과 방송 뉴스로 국민들 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다. 그 사고(事故) 또는 사고(思考)거리들이 끼친 영향과 파급은 무수하겠는데, 우리의 논의의 맥락에서 보아 흥미로운 것 은 그것이 근대-탈근대 논란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마침 계속되 고 있는 소용돌이의 와중에 나온 문학 전문지들이 그와 관련한 특집좌담 과 글을 싣고 있다.
관련되는 글들은 `실천문학' 봄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경희대 영문과)의 ‘문학성 문제와 이 시대의 문학’, `세계의 문학' 봄호에 기 고한 문화평론가 조형준씨의 ‘우리가 언제 근대를 살았던가?’, 그리고 월간 시전문지 `현대시' 3월호가 마련한 특집좌담 ‘다시 `현대성이 문제 다’ 등이다. 이들 글과 좌담의 필자·참석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최근의 사회 상황을 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첨단’의 담론이 적 어도 우리의 처지에서는 지나치게 때이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도정일 교수의 글은 ‘문학성’(Literariness)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구하 기 위한 그간의 노력들을 살펴보고 그 개념의 당대적 유효성을 점검해 보 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고전적 문학론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에서부터 러시아 형식주의와 미국의 신비평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문학이 론이 골몰한 것은 문학 또는 문학성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찾고자 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상 안정에의 기도는 “문학성이라는 개념 자체 가 역사적 구성물이며 이데올로기적 성격의 것이라는 점”을 놓침으로써 문학(성)에 대한 온당한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이 점은 ‘과학적 문학연 구’를 표방하는 구조시학, 기호시학, 서사학 등 현대의 형식주의 이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같은 몰역사적·탈이념적 문학 논의에서 벗어나기 위 해 도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문학의 역사적 성격, 정치적 입장,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려”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론적 논의들은 구체적으로 90년대 한국문학과 어떤 관 련을 갖는 것일까?
“우리는 근대사의 전 과정을 통해 세계에서도 가장 참담한 역사를 경험 한 민족이다. 전통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초기 노력의 좌절과 실패, 식민지 종속, 전쟁, 분단, 왜곡된 근대화 과정과 정치독재, 민주화 투쟁, 천민 자본주의의 이식, 공동체 와해 등 역사의 거대한 타격과 폭력을 겪 은 것이 근현대 한국인의 경험이며 이 경험의 모든 고랑에는 이산, 뿌리 뽑히기, 박탈, 종속, 희생, 배반의 구체적 고통들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만한 크기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만한 깊이의 고통을 겪은 민족치고는 그 손에서 생산된 문학이 대체로 이처럼 빈약하고 미미할 수가 없다.”
경박성 벗어나 근대적 현실 주목하라
도 교수가 “경험의 풍요와 표현의 빈곤 사이에 끼어드는 괴리” 또는 “ 왜소성”으로 부르는 우리 문학의 이런 특징은 90년대 들어서는 “잠자리 날개보다도 더 가벼운 경박성”으로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90년대 문학 의 경박성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소멸이라는 국제적 변화와 문민정부의 등장이라는 국내 상황의 결합이 한국인의 인식 지도에 일으킨 `청맹과니 효과”의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단 한번의 문민정부 등장이 민주주의를 완전 보장하는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양 식이 갖고 있는 악성 모순과 문제들의 전 지구화를 뜻할 뿐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노동법 파동은 이 모순의 국지적 노출이다” 그러 니 “세계는 망해 가고 할 일은 태산이다” 또는 문학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말해 보자면 “문제는 많고 쓸 것은 태산이다. 쓸 것이 없다니?” 조형준씨 글의 메시지는 반어적인 질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제목에 충분 히 들어 있다. 지난 겨울, 다시금 태풍의 눈이 된 명동성당 앞을 지나다 목격한 하나의 풍경으로부터 길어올린 이 글에서 조씨는 탈현대의 담론과 근대 이전의 현실 사이의 괴리에 주목한다. 그 괴리는 도 교수가 ‘경험 의 풍요와 표현의 빈곤 사이의 괴리’라고 말한 것과 일부 겹치기도 한다 . 조씨가 보기에 지난 겨울의 노동법 파동이 뜻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 직 모더니티의 핵심적 요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지난 몇년간의 철학적 논의와 달리 우리 현 실은 아직 모더니티의 초입에 서 있는” 격이다. 그러니 “최소한 지난 9 0년대 초반에 지식인 사회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명동 거리의 패션 말고는 달리 거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게 된다.
이같은 90년대 지식사회의 풍토는 세계적으로 보나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보나 매우 특이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학생을 포함한 지식 인의 현실 참여는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의무사항으로 요구되어오 기까지 했다. 90년대는 이론과 실천(또는 현실) 사이의 간격이 최고도로 벌어진 시기이다. “이성과 합리성, 역사 진보의 방향 등 우리 사회에 가 장 필요한 요소 또는 가장 핵심적인 의제가 되어야 할 내용들을 이미 낡 은 것이라고 비난”해온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은 “애 씻은 물과 애를 함께 내다버”리는 일과도 같다. 조씨는 결론적으로 ‘자기 성찰’이라는 근대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우리 풍토에는 맞지 않는 프랑스 사상의 도입과 추종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현대시>의 좌담에는 시와 평론을 겸하고 있는 김정란·장석주·남진우씨 와 평론가 오형엽씨가 참여했다. 근대(성) 대신 현대(성)라는 용어를 택 한 이 좌담에서는 장석주씨가 탈현대성의 현실적 근거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밝힌 반면, 김정란·남진우씨는 탈현대라는 개념이, 특히 우리 현 실에서는, 부적절하고도 부당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남진우씨는 우 선 “현대성 속에는 이미 탈현대성의 씨앗이 잠복해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현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다양하면서도 자기모순적인 요소들 의 공존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부친살해를 현대성의 특징으로, 자기살해 를 탈현대성의 특징으로 볼 경우 “현대는 부친살해의 역사이자 자기살해 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탈현대성에서 말하는 주체의 죽음은 현대로 부터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극단에 이른 현대성의 한 발현이라고 본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포스트모던의 ‘포스트’(Post)를 ‘탈’(脫)이 아닌 ‘후기’(後期)로 이해하려는 입장과 일치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 니즘의 부정이라기보다는 그 연장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성적 측면 재인식 필요
남씨는 이어서 탈현대론의 한국적 부적합성을 역설한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 최근의 정치·경제적 사건들이 명백히 말해주고 있듯이, 중요한 것 은 현대의 착실한 완성이지 탈현대로의 경박한 미끄러짐이 아니”라는 것 이다. 도정일 교수나 조형준씨의 입론과도 통하는 이런 진술에 이어 그는 특유의 문학론으로 나아간다: “오히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현대와 탈 현대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현대로도 탈현대로도 해결되지 않는 어떤 결핍에 대한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의 영성적 측면에 대한 재인식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보여집니다.” 김정란 씨는 우리의 현실이 ‘포스트모던’이라는 형용사로 규정할 만한 징후들 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포스트모더 니즘으로부터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훨씬 더 많이 수용한 듯하다”고 밝혀 남진우씨와 같은 편에 섰다.
근대적 현실과 탈현대적 담론 사이의 불일치와 괴리에 대한 서로 다른 논 자들의 비판적 지적은 우리 문화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섣부른 포스트모더 니즘 논의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