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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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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기지촌에 어둠이 깔린다. 음식점 입간판에선 빨간 꼬마전구가 반 짝이기 시작하고, 거리엔 미군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낮에는 찾는 이가 드물던 옷가게며 가방가게에도 아연 활기가 돈다. 술집과 노래방이 몰려 있는 보산동 거리는 유난히 생기를 띤다. 영어가 큼지막하게 쓰인 간판들 은 어느새 울긋불긋한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삐죽 열린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팝송이 귀청을 때린다. 언뜻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엔 벌써 흥 취가 얼큰하다.
한국인 댄서 월급의 1/3
에이미(21)는 춤을 춘다. 마카레나 노래에 맞춰 신나게 팔다리를 흔든다. 발구름을 해 몸을 1백80도 돌릴 때마다 속이 비치는 얇은 치마가 허벅지 께에서 펄렁거린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사이키 불빛을 받아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꾼다. 빨개졌다 파래지고, 노래졌다 다시 빨개지고. 병사들은 맥주를 홀짝이며 그에게 보란 듯이 엄지손가락을 쳐든다. 그럴수록 에이 미의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춤은 더욱 요염해진다. “하루에 두번 무대 에 서요. 주말엔 한번 더 춤을 추죠. 월급도 괜찮고, 미군들 술친구를 해 주며 받는 팁도 쏠쏠해요.”
에이미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술집‘CLUB VIP’의 필리핀 댄서다. 요즘 이 바닥에서 꽤 잘 나가는 아가씨다. 미군들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다. 토요일 밤이면 각지에서 찾아온 필리핀 노동자들로 홀이 북적거릴 정도라고 한다. 처음 기지촌에 들어와 춤을 출 때만 해도 낯선 이들에 둘러싸여 외롭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한 결 익숙해졌다. 한푼두푼 돈을 모으는 재미도 붙었다. 에이미는 “가족이 그리운 점만 빼면, 한국생활이 좋다”며 활짝 웃는다.
그는 지난해 10월 동료 네명과 함께 이곳에 취직했다. 필리핀에선 교사가 되기를 꿈꾸던 학생이었지만, 가난에 시달렸다. 공사판을 떠도는 아버지 의 수입으론 4남3녀가 생계를 잇기도 버거웠다고 한다. 마침 마닐라의 인 력송출업체에서 댄서를 구한다기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한 달에 5백5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필리핀에서 보 통 받는 월급의 4배 가까운 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언니 메리야(23)까 지 꼬드겨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메리야는 지금 맞은편 ‘NEW HO USE CLUB’에서 댄서로 일한다.
그는 매달 3백달러를 집으로 부친다. 인력송출업체에도 꼬박꼬박 1백50달 러가 들어간다. 취업비자가 만료되는 6개월 안에 수수료 1천달러를 갚도 록 돼 있다. 그러다보면 남은 1백달러와 미군들 술친구를 해주고 받는 팁 으로 한달을 버틴다. 10달러짜리 술을 마시면 2달러가 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미군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 하루에 7~10잔씩 마시는 게 보통이다 . 그렇게 번 돈으로 가끔 시내구경도 하고, 쇼핑도 한다. 에이미는 “비 자를 연장할 수 있다면 1년 정도 더 돈을 벌어 필리핀에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기지촌의 한국인 업주들은 에이미 같은 필리핀 댄서를 좋아한다. 미군들 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경기가 예전같지 않은 업주들에게 이들은 손 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이다. 게다가 이들은 영어가 능숙해 미군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급이 싸다. 통상 한국인 댄서에게 주는 월급의 3분의 1이면 족하다. 이들이 미군들과 마신 술값에서 팁을 나누는 비율도 업주에게 훨씬 이롭다. 한국인 댄서는 술값 의 절반을 팁으로 챙기지만, 이들은 20%를 받는 데 그친다. 업주들이 30% 나 더 이익을 보는 셈이다.
그러나 필리핀 댄서들이 이처럼 기지촌에서 각광받는 데는 좀더 깊은 까 닭이 있다. ‘CLUB VIP’를 운영하는 이명석(50)씨는 “요즘 한국인 댄서 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같다”고 푸념한다. 최근 몇년째 한국인 댄서 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지촌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동두천만 해 도 33개 클럽 가운데 한국인 댄서를 고용한 곳은 한두 곳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아예 댄서를 고용하는 걸 포기했죠. 요즘 세상에 무대에서 밤새 춤추고, 미군들 술자리에 끼려는 한국여성들이 있나요. 그 빈자리를 필리 핀 댄서가 메우고 있는 겁니다. ”
올해에도 필리핀 현지서 댄서 모집
현재 동두천에는 대형 클럽 4곳을 중심으로 20여명의 필리핀 댄서가 활동 하고 있다. 사실 이들이 동두천 전체의 댄서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평 택과 오산, 송탄 등지까지 합치면 전국적으로 1백명 가까운 필리핀 댄서 가 기지촌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모두 지난해 8월 이후 취업한 이들이다. 그만큼 기지촌 댄서의 국적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 “조만간 기지촌이 필리핀 댄서들에게 점령당할 것”이라는 말까지 돌 정도다. 업주들도 그들의 ‘진군’을 환영한다. 업주들이 속해 있는 한국특수관광업협회(회장 김경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필리핀 현지에 서 댄서를 모집할 계획이다. 협회쪽은 “찾기도 힘들고, 임금도 비싼 한 국인 댄서들에게 더이상 목을 맬 수 없다”고 말한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기지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진다. 필리핀 댄서들의 춤도 격렬함을 더해간다. 홀을 울려대던 음악소리가 그 열기를 식히기라 도 하듯 잠시 숨을 죽인다. 메리얀(24)은 막 무대를 내려왔다. 거친 율동 을 계속한 탓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다. 탈의실 겸 분장실로 쓰는 다락으로 올라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매만진다. 춤을 출 때, 한 미군으로부터 술 한잔 하자는 눈짓을 받은 터였다. 앞으로 2시간 동안은 홀을 돌며 미군들과 술을 마셔야 한다. 거울을 보며 깊게 숨을 고른다. 필리핀에 5살짜리와 2살짜리 아들을 둔 그는 이런 생활이 낯설지 않다. 이미 세차례나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다른 것이라곤 상대가 일본 인에서 미군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신세를 한탄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일이니까. 그동안 번 돈으로 고향에 집도 장만했고, 조금이나마 식구들 형편도 나아져 기쁘다. 남편과는 한국에 오 기 전 이혼했다. 그래서 좋은 미군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 “돈도 벌고, 멋도 낼 수 있는 한국생활이 나쁘지 않 다”고 한다.
그래도 향수는 어쩔 수 없다. 특히 아이들 얼굴은 이따금 눈에 밟힌다. 어쩌다 화장실까지 쫓아와 추근대는 미군을 만나면 더욱 선하다. 그럴 땐 클럽이 문을 닫자마자 방에 들어가 국제전화를 건다. 아이의 맑은 목소리 에 금방 마음이 가벼워진다. 클럽에서 마련해준 방은 동료와 둘이서 쓰게 돼 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이라 늘 어지럽다. 옷가지며 화 장품, 과자, 사진첩 따위가 대강 자리를 잡은 정도다. 메리얀은 이 방에 서 필리핀 노래를 듣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동료와 잡담을 나누다 잠에 든다.
클럽의 열기가 하나둘씩 사그라들면 거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클 럽에서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동두천엔 지금도 이른바 양공주라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다. 이들과 미군들이 소곤 거리는 모습은 그래서 일상에 든다. 그러나 최근 들어 거리에 낯선 필리 핀 여성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들은 댄서가 아니다. 캐주 얼한 차림새가 그들과는 딴판이다. 바로 요즘 기지촌에 뿌리를 내리고 있 는 필리핀 매춘여성들이다.
매춘여성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
타미야(24)는 올해 초 이곳에 흘러들었다. 지난해 9월 관광비자로 들어와 15일 뒤엔 불법체류자가 됐다. 처음엔 서울 변두리의 영세공장을 전전했 다. 그러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기지촌으로 발길을 돌렸 다. 미군과 사귀면 돈도 벌고, 운이 좋으면 그와 결혼해 미국으로 갈 수 도 있다는 유혹이었다. 타미야는 일단 여관에 방을 잡고 장기투숙에 들어 갔다. 밤이면 클럽 주변을 배회하며 미군에게 접근했다. 생활비를 마련하 기 위해 20~30달러에 몸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여관생활은 자취나 다름 없었다. 간단한 취사기구를 장만해 주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던 그는 얼마 전 한 미군과 살림을 차려 마침내 꿈을 이뤘다. 그는 요즘 “ 미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타미야 같은 거리의 필리핀 여성들은 동두천에만 1백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대개 여관에 몇달씩 묵으며, 미군과 살림을 차린다. 미군은 이들 을 대신해 한달 투숙비 4백달러 가량을 내주고, 수시로 음식이나 옷가지, 생활비를 제공한다. 개중에는 사실상 부부관계로 발전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기지촌 주변의 몇몇 여관은 아예 이들을 상대로 방을 세놓아 잇속 을 챙긴다. 기지촌의 한 한국인 댄서는 “ㄷ여관, ㅎ장 같은 곳에 필리핀 여성들이 집단으로 투숙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ㅎ장 현관에는 ‘SPE CIAL ROOM FOR RENT’(방 세놓음)란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동두천에선 금기로 통한다. 클럽 업주를 비롯해 주민들은 이들에 대해 내놓고 말하기를 꺼린다. 취업비자가 있어 합법적인 신분을 가진 댄서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부분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단속이 들어오고, 세간의 이목이 쏠리면 기지촌의 인상이 나빠질 것을 우 려하는 것이다. 한국특수관광업협회 동두천지부의 입장은 더욱 완강하다. 지부는 공식적으로 그런 필리핀 여성이 없다고 강변한다.
기지촌 유흥가 ‘점령’은 시간문제?
그러나 이들이 기지촌의 새 ‘점령군’이 될 것이라는 조짐은 이미 나타 나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의 쉼터인 새움터의 엄상미씨는 “거리의 필리 핀 여성들은 추적이 힘들어 실태가 가려져 있지만, 최근 부쩍 늘어난 것 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러다보니 한명의 미군을 두고 한국여성과 경 쟁하는 일도 꽤 잦다고 한다. 아직은 텃세가 우세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 란 보장은 없다. 댄서가 그랬던 것처럼, 거리의 한국여성들도 자꾸 이곳 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지촌은 지금 새로운 여성들을 맞고 있는 것이다.
동두천=글 유강문 기자 사진 이재승/ DOCUNET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