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한겨레21

당신과의 싸움을 회상하며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승리하기는 승리하는 것일까?

요즘 신문과 방송을 보고 듣노라면 얼떨떨하기조차 하다. 김영삼 대통령 치하에서 성역 가운데 성역으로 꼽히던 김현철씨 문제가 신문마다 뉴스마 다 터져나오는 모습을 쉽게 상상하기나 할 수 있었던가. 그런 판이라 이 제서야 ‘김현철’로 도배되는 신문과 방송 앞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의 기분은 오히려 착잡스럽기까지 하다. 그 묘한 감정상태에서 다시 긴장을 느낀다.

참으로 권력이란 것은 강했다. 엄청났다.

`한겨레21' 창간호에서 곽병찬 기자가 한국언론 사상 처음으로 ‘황태자 김현철’의 ‘비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사실상 한겨레는 김영삼 정권의 보이지 않는 압력의 자장 속에 놓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기사에 이름이 언급된 사람이 명예훼손 혐의로 우리쪽을 고소하고, 피 를 말리고 진을 빼는 법정공방이 오래도록 계속됐다. 사실 일반 독자들은 5공화국식의 폭력적인 언론탄압에 대해선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명예훼손의 이름 아래, 아니면 다른 식 으로 알게 모르게 조여오는 사실상의 언론탄압이 얼마나 해당언론과 해당 기자의 심신을 괴롭히는지 잘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현행 명 예훼손에 관한 법률이 기사의 사실에 대한 입증의 책임을 기사를 보도한 쪽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권력의 엄청난 위력을 잘 알거 나 느끼는 사람들이 무시로 증언을 번복하거나 진상을 왜곡하는 상황에서 진실을 추적 보도하려는 언론인의 의지는 현행법에 의해 쉽사리 나꿔채지 거나 발목을 걸리게 돼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다수 언론이 진실을 향한 다른 언론의 노력에 대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상황에서 권력 의 비리를 파헤치려는 언론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독했는지…. 그와 관 련된 많은 기사들이 생각난다.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 혼자 법정에 불 려나가 피곤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책 임지고 싸우겠다는 의지로 기자의 이름 대신 ‘특별취재반’이라는 이름 을 썼던 것들도….

다시 텔레비전을 본다. 그 김현철씨가 나와 ‘국민 여러분께 제 심경과 입장을 밝힙니다’라는 문건을 공표한 것을 보며 다시 긴장한다. “저는 제게 잘못이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있다면’이라 니…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다 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

***`한겨레21' 오귀환 편집장은 `한겨레' 민권사회1부장으로 자리를 옮깁 니다. 앞으로는 곽병찬 `한겨레' 생활과학부장이 새로 `한겨레21' 편집장 으로 일합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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