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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1997년03월27일 제 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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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
‘깃털’을 희생양으로 삼고 ‘몸체’를 보호하기 위한 검찰 수사와 자신 에게 쏟아지는 세찬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더불 어 한보사태를 서둘러 종결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의 제1막이 끝나고 제2막이 개막됨을 알리는 징소리가 됐다. 아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는 오히려 아들문제를 제2막의 본격적 주제로 끌어올렸다. 대통령의 사과가 있자마자 그동안 성역 중의 성역에 속했던 ‘소통령 김현철’의 문제가 봇물 터지듯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의 아들이 앞으로도 계속 소통령으로 군림하는 것은 물건너 간 일이 되고 말았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조직한 대통령 친위사 단이 해체의 위기에 빠져들었고, 아들문제로 늪에 빠진 대통령은 그 늪에 서 빠져 나오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으로 가장 기피했던 인물에게 당 대표 직을 맡기는 데로까지 사태가 진전됐다.
소통령, 대통령 비호가 있었기에…
이 드라마의 제2막은 소통령의 비리와 월권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고, 국회 공청회가 사태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소통령 은 대통령의 비호가 있었기에 소통령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통 령이 ‘읍참현철’(泣斬賢哲)의 비장한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소통령문제 를 부른 사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읍참현철’은 정치적으 로 보면, 1인자가 자신이 살기 위해 2인자를 살해하는 권력정치적 술책에 해당할 것이며, 윤리적으로는 아버지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 키는 반인륜적 행위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심각성은 ‘읍참현철’ 의 단안조차도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드라마의 제3막은 제2막의 전개양상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제3막이 개막된다면, 그 주제는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이 져야 할 책임문제가 될 것이다. 제3막의 전개는 아마도 대권주자들간의 본격적인 권력투쟁과 더불어 개막되어 15대 대선에서 승자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 하기 위해 과거청산을 행함으로써 폐막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 정에서 14대 대선자금 문제가 다시 거론됨으로써 제3막 역시 많은 국민들 을 흥분시키는 극적인 내용을 담게 될지 모른다.
한보사태로부터 시작해 소통령의 문제를 거쳐 대통령의 책임문제로 이어 질 이 드라마의 에필로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해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이미 쓰여진 각본에 따라 전개 되는 극이 아니라, 극의 전개를 달리하려는 연출자들이 바로 무대의 배우 가 되어 서로 각축을 벌이는, 각본없는 극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극 전개에서는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권력집단들만이 주연배 우의 역할을 맡았고,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일반국민들은 단지 관객으로 머물러 있었다. 드라마를 관람하는 동안 국민들은 야유와 환호성을 질러 댔지만, 그것이 극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주연 배우들이 권력집단들이고, 일반국민들이 관객으로만 머물러 있는 이상, 이 드라마가 한보사태와 소통령의 문제 등을 부른 우리 사회 구조의 발본 적인 변혁으로까지 진전될 가능성은 없다. 폐기돼야 할 사회구조의 변혁 없이 행해지는 인간에 대한 응징은 구조변혁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며, 그 러한 한 인간에 대한 응징은 응징의 참된 목적을 상실한 단순한 복수극으 로 끝날 수밖에 없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가 단순한 복수극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폐기돼야 할 사회구조의 변혁으로까지 나아갈지는 얼마나 많은 일반국민들이 관객의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직접 극을 전개 시키는 배우가 되기 위해 무대 위로 뛰쳐올라 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드라마는 정치극이다. 그런데 정치란 권력관계의 유지·변화를 위한 인간들 간의 투쟁인 권력투쟁을 매개로 하여 인간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재생산시키거나, 변화·혁신시키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치극의 배우가 되기를 원한다면 권력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력을 지녀야 하며, 더욱이 정치극의 주연배우가 되기를 원한다 면 타 세력들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권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 므로 정치극의 주연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국민 역시 자기 자신의 권 력, 즉 대중권력을 강화시켜야 하며, 대중권력의 강화는 무엇보다 대중정 치, 즉 노동자-민중정치 및 시민정치 등의 활성화로부터 나온다.
노동자-민중정치 활성화 계기로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지속된 노동자총파업투쟁과 각계 각층의 연대 투쟁은 대중권력을 크게 강화시키고 노동자-민중정치를 대폭 활성화시키 는 계기를 제공해 줬다. 이 점에서 지난 번의 총파업투쟁은 대중권력의 강화와 노동자-민중정치의 활성화를 알리는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소리 ’와 같은 것이었다. 현 시기는 우리 모두가 어둠을 가르며 퍼진 이 울음 소리에 화답하여 구조변혁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작업에 본 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