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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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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히르시 교수는 독일 민주화에 큰 영향을 준 ‘68세대’의 대표 주 자로서 현재 프랑크푸르트대학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국 민적 경쟁국가 :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국가·민주주의 그리고 정치'(1 995), `정치·제도 그리고 국가'(1994), `대안없는 자본주의인가?'(1994) , `자본주의의 새로운 얼굴'(1986) 등이 있다.
-한국은 지난 수십년 동안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눈길을 끌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이 억압적인 정치체제와 결부돼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의 21세기는 어떠할 것으로 예상하 는가. 경제에 비해 낙후된 정치민주화가 순조롭게 실현되리라고 보는가. 아니면 세계적 경제환경 변화에 따라 경제마저 정체하리라고 보는가. 우 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원론부터 진단해봤으면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갖는 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를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어느 경우에도 사유재산에 기초한 사회구조와 관계들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 경우 국가는 기존의 사회구조와 관계들을 다소간 민주적으로 변형 시키거나 확장·발전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민주적인 정치제도란 기본적으로는 국민들에게 비록 제한된 형태로나마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인류의 지난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제한된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조차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 의미 역 시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서구사회의 경험을 보면, 대의제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는 다소간의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대략 자본주 의적 발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정치발전 사이의 이러한 불균형은 한국을 비롯해 남미국가,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남유럽국가들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이다. 그렇다 면 자본주의적인 후발산업화와 민주화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 고 생각하는가.
=한국과 같은 후발산업국에서는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경쟁상황, 그리고 예부터 유지되어온 후진적인 사회경제적 유산들로 인해 민주주의적인 정 치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보다는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가 경 제발전과 상당한 친화성을 갖고 존재해왔다. 유럽사회에서 후발산업국이 라 할 수 있는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유민 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여지듯,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발전과 함께 저절로 얻어지는 열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많은 신흥공업국들은 ‘높은 수준의 복지수준을 자랑하는’ 서구발전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서구사회의 발전과 한국의 발 전과정은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서구적 발전모델은 2 1세기를 앞둔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서구사회가 2차대전 이후 안정적인 정치적 민 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장기적인 호황,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하에서만 가능 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복지국가적 체제는 한 국민국가 내 에서 조절되는 국내 시장지향적인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만 가능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발전추세로 볼 때 국민국가에 기반 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에 반해 세계시 장의 경쟁조건에 기반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강화되고 있 다. 따라서 서구적 발전을 가능케 했던 예전의 역사적 경제적 조건은 분 명히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러한 시대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 또 한 사실이다. 이를 고려해볼 때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한국은 쉽지 않 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복지제도에 기반한 민주적 자본주의가 앞으로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와 같은 세계적 전환기에 어떤 완성된 모델을 제시하기란 무척 어렵다. 지금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민주세력들이 한편으로 각국의 특수한 상황에 알맞은 새로운 정치전략을 찾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에 대해 일정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국의 경우 지난 군사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요구는 철저히 억압되어 왔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노 동자들의 기본권 회복을 위한 제도적·법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논의가 진 행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라 할 때,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신장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의 민주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선진산업국가의 지난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한국에서 노 동운동은 민주주의에 어떤 구실을 할 것이라고 보는가.
=선진자본주의사회의 경우, 나라별 경험사례가 다르기는 하지만 노동운동 은 민주화과정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 지배층은 늘 자신들만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데 관심을 두어왔고, 대중 이 그 권력을 골고루 나눠갖는 것에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 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지속적 발전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정치적 투 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정 치적 힘이 필요하고 이는 민주세력들이 우선적으로 노동자들의 기본권인 집회·결사·파업의 자유와 민주노조의 법적인 인정 그리고 노동운동가들 을 정치적 박해로부터 지켜내는 일에 몰두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생각 하기에 한국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이루는 것이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 변하는 특정한 정당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 노동운동, 특히 노동 조합이 충분히 성장해 강대해지면 기존의 정당들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하 고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화과정에서 노동운동은 여타의 사회운동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오늘날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도 사회문제가 단지 여러 계층들 사이의 경 제적 갈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버금가게 인권문제와 환 경, 그리고 여성문제도 중요하다. 19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이런 모든 분 야에서 동시적으로 운동이 진행되지 않는 한 민주적 사회발전이란 불가능 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도 여타의 사회운동을 포괄하고 그들 과 협조하지 않는 한 진정한 성과를 이루기 어렵고 또한 더 나아가서 진 보적이고 민주적인 힘을 진정으로 발휘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사회가 누려온 높은 복지수준이 다른 한편으로 엄청난 환 경파괴를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구사 회의 성장모델을 맹목적으로 뒤쫓아가는 후발 신흥공업국들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빨라진 오늘날, 인류사회는 거대한 환경위기의 위험 속에 사 로잡혀 있다.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 실한데, 과연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가 지금까지의 발전모델과는 다른, 환경친화적이면서 지속가능한 성장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대량생산·대량소비에 기초한 서구사회의 발전모델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만일 이 모델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된 다면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록 기본적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 의하에서도 어느 정도 환경친화적으로 다듬어진 발전모델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델 역시 주도권을 국가와 자본에만 맡겨 둘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이 압력을 행사할 때만 관철될 수 있다는 사실 이다. 노동운동이 여타 사회운동과 연대해야 할 필연성이 여기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른 한편 국민국가 차원에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데 환경문제의 또다른 특성이 숨어 있다. 이 점에서 국제적인 연대가 필수불가결하다. 경험상으로 보건대 개별 국민국가들은 자국 자본의 이해와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정 책을 실천하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내기 어렵다. 좀더 효과적인 국제연 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별 국가차원에서는 물론 국제적 차원에서도 압력 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자발적인 조직’의 활 성화가 필요하다.
-한국과 독일은 오랜 기간 동서냉전의 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국의 경우 분단상황은 국내 정치 민주화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끼쳐 왔고, 지금도 민주적 발전에 중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점 에서 동서독의 통일은 우리에게 또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서 독의 분단상황이 과거 서독사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나? 남북한 통일 에 대한 전망과 관련해 동서독 통일과정을 간단하게 평가한다면.
=옛 서독의 경우에도 민주화과정은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로 인해 60년대까지도 상당히 침해됐다. 이러한 상황은 60년대 말에 와서야 긴장 완화정책과, 특히 68년 학생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운동에 의해서야 변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서독사회의 민주화를 촉진시키고 반 공이데올로기를 약화시키면서 분단된 동서독을 어느 정도까지 서로 가까 워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서독의 민주주의적 발전은 물질적인 풍 요함과 함께, 동서독주민들에게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간 게 사실이다. 89 년 동독 정권을 무너뜨렸던 동독주민들의 저항운동도 사실은 그들 나름대 로 이해한 서독의 민주적 정치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동독의 많은 민주세력들은 통일 뒤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는 데, 이는 서독에 의한 동독의 급속한 흡수통일이 마치 식민화 과정과 같 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서독의 지원하에 동독이 자립적인 경제적 민주주의적 발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더라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겠느냐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그랬더라면 두 사회가 좀더 차근차근, 더 자주적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서도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대담=브레멘/ 최우성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