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커스 |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
|---|
(사진/금융실명제 완화를 발표하는 강경식 경제부총리. 금융실명제 완화 조치에 대해 `경제논리로 포장된 정치논리'라는 지적이 많다.)
강경식 신임 경제부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내세운 금융실명제 보완론(완화 론)이 일파만파의 찬반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강 부총리는 3월5일 개 각 발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개혁과 사정 차원의 비리척결에 초점 이 맞추어진 현행 금융실명제를 세제면에서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그의 말이 금융실명제 실시강도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뜻으로 확인되면서 각계에 파장을 불러왔다.
보완이 아닌 완전한 사형선고
강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고건 신임 총리와 청와대 관계자는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비추어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 심에서는 금융실명제 완화에 대한 교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인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즉각 성명을 발표해 “그나마 불완전한 금융실명제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오히려 강 화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재경원 등의 실무공무원들도 다 수가 강 부총리의 금융실명제 완화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관계공무원은 “강 부총리의 금융실명제 완화론은 사실상 금융실명제를 해체시킬 공산이 크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같은 논란은 일단 금융실명제의 실시목적과 지난 3년 반 동안의 실시성 과에 대한 견해차이라는 겉모습을 띠고 있다.
강 부총리는 비리척결이 아닌 지하자금의 양성화가 금융실명제의 목적이 돼야 한다는 태도를 밝혔다. 따라서 실명전환하는 비실명 자금에 대한 출 처조사를 완전히 면제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무기명 장기채권 등 신분 비밀 보장형 금융상품을 새로 개발해 제도금융권에 지하자금의 안전한 활 동공간을 터주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재 4천만원으 로 돼 있는 금융소득종합과세 적용 기준금액을 상향조정해 지하자금 실명 화에 따르는 세금부담도 줄여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갖고 있는 것으로 전 해졌다.
강 부총리의 이같은 금융실명제 완화론은, 그와 새 경제팀이 한보사태라 는 비자금비리 사건에 대한 문책개각으로 기용됐다는 점과 정면 배치되는 방향이기도 해 주목된다. 상식으로는, 최근 잇따라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한보사태 등이 검은 돈을 온존시키고 있는 현행 금융실명제의 허 점을 드러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새 경제팀은 금융실명제의 성긴 그물막을 좀더 촘촘히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강 부총리는 이와 정반대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필상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현재의 금융실명제는 합의차 명 거래의 허용, 지나치게 강력한 금융거래자 비밀보호조항, 너무 많은 예외상품 인정으로 인한 금융소득종합과세의 실효성 실추 등의 문제점을 이미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지금은 금융실명제의 완화가 아닌 보강이 오히려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해, 강 부총리와는 정반대되 는 의견을 피력했다.
법을 지킨 사람만 손해본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세무행정의 시각에서 강 부총리의 금융실명제 완화 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소득종합과세로 완결되는 것 이며, 지금은 오는 5월로 예정된 그 첫 과세를 앞두고 제도의 안착에 전 념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런 때에 종합과세 기준금액의 인상, 예외상 품의 새로운 도입 등을 거론하는 것은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 관계자는 또 지하자금 양성화를 한다고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해 주는 조처를 앞으로 취할 경우, 이미 출처소명을 하고 증여세나 과징금을 납부하는 등 그동안 법을 지킨 사람만 손해를 보는 꼴이 돼 과세형평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강 부총리의 금융실명제 완화론에 대해 ‘경제논리로 포장된 정치논리’ 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금융실명제 완화론은 지난해부터 여야 정 치권에서 꾸준히 확산돼 왔으며, 그 역시 정치인인 강 부총리의 이번 발 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여야 정당간에도 대통령선거를 앞둔 지금 시점 에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본질적인 태도차이는 없어 보인다. 강 부총리의 발언 직후 자민련은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국민회의도 대통령 긴급 명령 형태로 돼 있는 현행 금융실명제를 정식 일반법률로 대체입법하자는 주장 외에는 이렇다 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강 부총리쪽 이 즉각 이같은 대체입법 방안까지 수용할 뜻을 비치자, 국민회의는 더이 상 할말이 없어졌다.
금융실명제에 관한 정당간 태도차이가 이처럼 별 게 없다는 것은 대권경 쟁엔 여야가 있지만 정책경쟁에선 여야 개념이 희미한 기존 정당구조의 실상을 희화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당이든 선거를 앞두 고 보수층의 입맛에 맞게 처신해야 하고, 정치자금이나 선거자금 조달과 운영에서는 상당 부분 이해관계가 겹칠 것이 뻔하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 서는 구체적인 세율 조정폭 등 기술적인 몇몇 쟁점들만 여야간에 조율된 다면 앞으로 금융실명제 수정안이 의외로 쉽게 타결될 가능성도 크다. 다 만 강 부총리가 말한 대로 금융실명제의 완화가 이루어질 경우, 정부와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일부 극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돌보는 데 급급했 다는 지적은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금융실명제와 금융소득종합과세로 인해 직접적인 고통을 받는 사 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자소득 배당금 등 금융소득이 종합과세 기준금 액인 연간 4천만원 이상이 되려면 은행예금 등 금융자산만 최소한 4억원 이상을 가진 재력가여야 한다. 이만한 거액 금융자산 보유자는 아무리 늘 려잡아도 3만∼4만명, 전체 인구의 0.1%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조세연 구원의 추산이다. 또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합의차명, 기업명의 금 융자산, 각종 비과세 및 분리과세 금융상품 등으로 종합과세 도피처를 벌 써 찾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금융기관의 자금중개기능을 활성화해야
경제가 어려우니 지하자금이라도 양성화해 산업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해 야 한다는 강 부총리 주장도 그 실효성이 의문시된다고 일부 경제전문가 들은 지적한다. 자금이란 구린 돈이든 깨끗한 돈이든 수익성을 쫓아 움직 이며, 구린 돈에 면죄부를 준다고 해서 수익성이 없는 곳으로 가지는 않 는다는 것이다. 현재의 실명제 아래서는 합의차명, 기업비자금 등 불법· 편법적인 자금운용 수단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이 단기적인 부양책이나 자금공급 확대로 치 유될 성격이 아니라는 데 대해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상황이다. 제대로 된 금융개혁을 통해 금융기관의 자금중개기능을 활성화하고, 산업 구조 조정을 통해 진정한 부가가치 창출형 경제체제를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하다. 이런 마당에 아직 지하경제 한구석에 남아 있을 또다른 ‘노태 우 비자금’에 면죄부를 주고, 이런 자금으로 경제활성화를 이루자는 정 책구상은 앞뒤가 뒤바뀐 느낌을 주며, 모종의 정치적 흑막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주명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