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노동법, “도로아미타불”

(사진/정치적 절충 끝에 노동계가 반발하는 노동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3월10일 `기립'으로 `찬성'을 표시하는 여야의원들. 민주당만이 당론으로 반대했다.)

노동관계법이 주고받기식 정치적 절충안 형태로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노 동법 개정이 형식적으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법안의 내용은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 합법화의 길이 열린 것을 빼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그 야말로 ‘먹어볼 것 없는 잔칫상’이 돼 버렸다. 민주노조운동을 결정적 으로 가로막는 독소조항들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산업평화는 물 건너가 고 새로운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동계의 반발 로 볼 때 새 노동법을 둘러싼 공방은 5월 총파업을 거쳐 대선국면까지 이 어질 전망이다.


국민 저항 큰 정리해고제 여당 후퇴

새 노동법은 정리해고제와 다른 독소조항을 맞바꾸는 식으로 타결됐다. 이는 정리해고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과 대선표를 의식한 여당의 후퇴로 이뤄졌다. 핵심쟁점이던 ‘기업의 인수·합병·양도’를 요건에서 빼고 2 년 유예함으로써 정리해고제는 종이호랑이가 됐다는 게 노동계의 솔직한 판단이다. 한 관계자는 “이 정도면 현재 이뤄지는 대법원 판례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노조활동을 가로막는 독소조항들이 그대로 유지된 데 있다.

노동법 개정의 본래 목적인 국제기준의 핵심인 ‘공무원·교원의 노동권 보장’이 완전히 빠진 점은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앞으로 국제노동기 구(IL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조항으로 세계 화를 말하는 정부의 논리가 무색해지게 됐다. 노조활동과 관련해 가장 피 부에 와닿을 조항은 5년 동안 단계적으로 감축되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다. 기업별 노조체제인 한국상황에서 이는 노조에 대한 사망선고와 마찬가지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김석준 교수(부산대 사 회학·영남노동운동연구소장)는 “5년 안에 기업별 노조체제를 산업별 체 제로 전환하지 못하면 한국노동운동은 고사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이 조항은 2년으로 늘어난 임금·단체협약 유효기간과 함께 4월 이후 본격화할 집중적인 단체협약 과정에서 재계와 노동계가 가장 날카롭 게 대립하는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무노동무임금, 대체근로제, 직권중재제도, 해고근로자의 자격 문제, 교섭권과 체결권의 일원화문제 등 대표적 독소조항들이 날치기안과 똑같거나 약간 개선된 형태로 살아있다. 국민적 공감대와는 관계없이 노 조활동을 제약할 악법들은 이것 말고도 많다. 이익분쟁 외의 권리분쟁은 노동쟁의로 보지 않음으로써 해고자복직문제 등을 걸고 파업을 벌이는 것 이 원천봉쇄됐다. 보안작업에 대한 쟁의와 생산시설 점거를 금지시켰던 날치기안의 내용도 그대로 남았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노동운동의 뿌리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조항들을 놔두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며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위원장 박인상) 등 양대노총으로 대표되 는 노동계는 새 노동법안을 ‘제2의 노동법 개악’이라고 규정했지만, 총 파업 등 총력투쟁을 당장 벌이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 합법화 받아들일 것인가

파업투쟁을 주도했던 민주노총은 지난해 말부터 한달 가까이 이뤄진 총력 투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산하노조 대부분이 집중적인 탄압에 맞 서 조직을 추스리고 있어 단체협약을 준비하는 데만도 힘이 부칠 지경이 라는 것이다. 노동법의 내용이 노동계의 요구와 너무나 먼 것이지만 당장 파업을 벌이지 못하는 사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해 말에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날치기 형식이 노 동자뿐 아니라 전체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형식 적인 면에서 여야 합의라는 점이 파업으로까지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정리해고제가 비록 법제화되기는 했지만 내용이 날치기안보다 나아져 이것만을 가지고 다시 공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 다. 꺼진 불씨를 다시 되살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한 단위노조위 원장은 현장의 고민을 이렇게 전달한다. 총파업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복수노조 금지와 정리해고제가 불충분하나마 타결의 양상을 보인 점이 파 업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즉각적인 파업 대신 임단협 국면에서 새 노동법의 독소조항에 대한 불복종운동을 국민운동 차원에서 벌여나가며 길게는 대선국면에까지 노동법 개정의 문제를 연계시키는 고민을 구체화하고 있다. 임단협 과정 에서 독소조항을 제외시켜 노동법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킨다는 전술이다 . 그러나 이 전술도 기업별 노조체제가 자사이기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 다는 점에서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총파업과 같 이 전국적인 전선을 형성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동운동계 일각에서는 산업별 노조체제를 실질적으로 준비한다는 뜻에서 지역단위와 산업별단위로 공동임투를 준비하고 있다.

어쨌든 한달간에 걸친 파업투쟁의 성과를 온존하게 법안내용에 관철시키 지 못한 노동계는 이래저래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민주노총은 당장 합법 화의 경로를 밟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내부적으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 전교조나 현총련 등이 합법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섣불리 합법화에 무 게를 둔다면 전체 조직을 추스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 다.


5월 총파업투쟁 준비 양대노총

또 새 노동법을 악법이라고 규정하면서 합법화를 서두른다면 스스로 법안 을 받아들이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게다가 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조합원 자격 시비가 외부에서 제기될 수 있다는 점도 합 법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노동계의 대응 수준은 임단협 국면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공동임 투 등이 계획대로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면 5월 총파업이 가능해져 다시 한 번 노동계의 단결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공동투쟁 여부와 학생운동권의 참여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의 대응과 그 성공 여부는 이번 대선국면에서 노동계가 미칠 영향 력의 수준과 노동법의 재개정 가능성을 결정할 것이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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