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워싱턴의 한반도 지배 끝내라

브루스 커밍스/ 워싱턴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콜롬비아대학에서 동아시아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 위를 받은 뒤 현재 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내 전’으로 규정하고 ‘남침유인설’을 기초로 한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책은 커밍스 교수에게 트루먼 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는 지난 60년대 남한을 방문한 데 이어 80년대 초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21세기를 앞두고 한반도는 두개의 꼬인 시계추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 하 고 있다. 냉전의 바람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한반도에서 가장 살을 에 이도록 불었고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도 세계무대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박물관이다. 한반도를 옭아매는 것 은 이런 시대착오뿐만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세계대전은 이 땅의 시계를 꽁꽁 얼려버렸다. 미-소 대결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동북아 지역 은 아직도 1940년대에 만들어진 조약체계 속에 갇혀 있다. 복잡한 예를 들 것도 없다. 10만이나 되는 미군이 일본과 남한에 지금도 주둔하고 있 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통일보다는 전쟁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에 중요한 기류변화가 불고 있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변화는 상당히 일관성 있게 뚜렷한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요점만 간추리면, 단기적인 북한의 경제위기, 워싱턴과 평양 사이 의 관계 심화, 서울과 평양 사이의 관계 악화, 과도기적인 남한 정치체제 의 위기, 새로운 전쟁 가능성, 그리고 아직도 먼 통일의 전망이다. 특히 마지막 두 항목은 한민족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비극적 요소로 남 아 있다. 나라가 분단된 지 반세기가 흘렀고, 냉전이 끝난 지 몇년이 지 났는데도, 통일보다는 전쟁 가능성이 더 크다는 엄연한 현실 말이다.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졌을 때 서울쪽의 공식입장은 북한이 동 독식으로 붕괴하고 대한민국에 흡수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 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남한에서는 ‘독일형’ 통일구상을 놓고 잉크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연구단이 독일로 날아가 통일 뒤 상황을 관찰하고 돌 아와서는 걱정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독일도 통일과정에 드는 비용이 엄청 났는데, 북한 경제를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얼마나 더 비용이 들겠 느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독일 경험은 한반도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 모델이다 . 독일과는 달리 한국은 끔찍한 내전을 겪었다. 수백만명이 죽었고 아직 도 한국인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는 통 일 직전인 1989년 현재 36만명의 소련군이 주둔해 있었다. 반면에 북한에 는 48년 이래 소련군은 한명도 없다. 독일이 무너진 것은 옛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군대를 동원해 부패한 공산정권을 지키려고 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남한은 자기 처지를 너무 쉽게 서독에 비교하려드는 것 같다. 많은 동독 사람들은 서독체제가 ‘사회주의적 이상’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고 보았 다. 민주주의정치, 사회보장제도, 높은 노동조합 가입률(40%), 퇴직 뒤 혜택, 높은 공공질서와 강한 시민사회 등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북한 사 람들은 남한에서 거의 이런 것들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흡수통일이라 도 된다면 북한 사람들은 남한 기업들의 요구에 따라 세계 산업국가 가운 데 가장 긴 시간을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설령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1990년대가 가기 전에 엄청난 국제적 압력으 로 무너진다 하더라도 북한의 정치체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 료들과 국가공무원들은 자기들은 줄곧 ‘민족주의자’였다고 우기면서(이 것은 어느 면에서 사실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만에 하나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북한의 어마어마 한 군대의 향배가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군대는 해산되 더라도 끝까지 싸우다가 해체될 군대이기 때문이다.

통일 위해 희생하는 정치지도자 없다

남북한의 정치 엘리트 가운데 아무도 아직은 통일의 숭고한 이상을 위해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를 희생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 남북이 분단된 지 5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분단의 고착화에 익숙해진 몇세대가 태어났 다. 파국적인 전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에 한 이름, 한 국기를 걸고 통일된 국가가 성립하는 데는 앞으로 몇십년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낙관할 수 있는 지표들이 많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 로 국무부에는 이제 경험이 풍부한 한국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동아시 아 담당 부차관보 찰스 커트만이나 평화봉사단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하 고 남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 리처드 크리스텐슨 같은 사람 이 그 예다). 나아가 한국정책 입안에 초당적인 지지 분위기가 형성되었 다. 사람들은 평양쪽과 첫 고위급 회담을 연 것이 부시 행정부였다는 사 실을 잊고 있다. 팀스피리트 훈련을 연기한 것도, 미국이 통제하던 핵무 기를 남한에서 철거한 것도 부시가 한 일이다. 지금은 공화당 주류에 속 하는 외교전문가들조차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 ‘연착륙’ 정책을 지지하 고 있다. 왜냐하면 이 편이 북한체제의 갑작스런 붕괴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새로운 한국전쟁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클린턴 행정 부도 북한이 붕괴하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다. 만에 하나 붕괴한다면 끔 찍한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막 으려 들 것이다. 또한 지난번에 핵위기를 그토록 능수능란하게 넘긴 북한 지도부가 국가가 붕괴하도록 대책없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한국에서 바라는 것(항구적인 미군주둔)과 미국 국민들이 원하는 것(미국인 병사 유해를 시체 행낭에 담아서 송환하 는 일이 없어지는 것) 사이에 엄청난 시각 차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난 95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외교 전문가 가운데 80% 이상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남한을 지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반면 에 국민들 가운데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39%에 불과했다.

95년에 남한은 북한의 3배나 되는 힘을 국방비에 쏟았다. 왜 미군은 아직 도 한국에 있어야 하며 몇십만명의 미국인과 몇백만명의 한국인을 죽일지 도 모르는 전쟁 위협 속에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이 쏟아낼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으면, 일본 이 핵무장을 할 것이고, 중국에 군사모험주의가 등장할 것이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불안해질 것이다”라고.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그들의 대 답은 달랐다. “미군이 남한에 있는 것은 소련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라 는 것이 당시의 대답이었다. 이제 소련이 붕괴한 마당에 안보 전문가들은 새로운 구실을 찾고 있다. 사실상 일본은 미국과 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한, 한반도의 전향적인 발전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대만과 홍콩 문제만 해도 골치아픈 중국이 한반도에서 모험주의를 발동할 염려도 없다. 한반 도에 미군을 주둔하는 진짜 이유는 딴 데 있다. 곧 북한을 가둬놓고 남한 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로

클린턴이 재선된 지금 북한은 워싱턴쪽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만일 미국이 대한반도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 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올 50년 동안도 미군이 남북한을 여전히 억제하 고 있는 상황이 될 것이다. 워싱턴은 이제 한국전쟁을 끝낼 때가 되었다. 53년의 휴전협정을 영구적인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이제는 한반도의 내 분에서 손을 떼야 한다. 지난 94년 10월의 일괄타결안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를 외교적 수단으로 해결한 쾌거였다. 이것은 앞으 로 한반도의 두 체제가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주춧돌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한반도 통일은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에 사는 국민들 자신의 손에 달 려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번역=보스턴/ 윤성주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