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희망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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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희망의 사람들 |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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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는 사회는 얼마나 삭막할까. 이런 지구상에서 아직도 꿈을 키워가
는 사람들. `한겨레21'은 100호부터 지난 148호까지 48개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번호 ‘지구 희망의 사람들’은 그 뒷얘기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한겨레21'의 발걸음은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모순을 그대로 보여 준다. ‘지구 희망의 사람들’로 뽑은 사람들은 분쟁 등 갈등의 해결, 여 성문제, 인종문제, 아동문제, 종교문제 등 여러 가지로 함축돼 있다. `한겨레21'이 닿지 않은 곳도 없을 정도다. 지역적으로 보면 유럽이 17번 으로 가장 많고 우리의 이웃인 아시아가 14번으로 그뒤를 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남북미 대륙이 11번 등장했다. 그 밖에 러시아 2번, 오스트레일리 아 2번, 남아공 1번, 이스라엘 1번 등도 ‘지구, 희망의 사람들’이 빼놓 지 않고 찾은 곳이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바쁘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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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환경사진 경연대회’ 95년 대상 사진작가 체리 알렉산더
“얼마나 사진촬영 여행을 다녔냐구요. 차라리 며칠간 집에 있었느냐고 묻는 게 낫겠어요.”
95년 세계환경사진전 대상작 `푸른 빙산'의 작가 체리 알렉산더(44·여) 는 전과 다름없이 극지를 누비며 멸종위기의 동물과 사라져가는 원주민의 생활상을 담는 구도자적 삶을 살고 있다. ‘사진예술의 위상을 높였다’ 는 극찬을 들었던 `푸른 빙산'의 명성도 그의 활발한 움직임을 막지는 못 하는 모양이다.
그는 최근에도 시베리아여행을 마치고 지난 3월7일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베리아행은 극동의 나딤에서 열린 순록 사육가 대회에 참관자 자 격으로 다녀온 것이다.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 대회는 북극지방 원주민 들이 많이 키우는 순록을 이용한 썰매대회의 조직을 논의하는 자리. 곧 남편 브리이언과 함께 펴낼 예정인 `순록과 인간' 작품집에 싣을 사진을 찍고 영감을 얻기도 한 여행이었다. 지난해 봄에는 핀란드에서 순록경주 를, 미국 몬태나에서 오소리와 야생늑대를 찍었고, 여름에는 아이슬란드 의 화산을 필름에 담았다. 핀스카라는 군용 앰뷸런스 제조회사가 스폰서 가 돼줘서 “한달 동안 이동캠핑을 실컷 즐겼다”고 한다. 다녀온 직후 그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폭발 전과 폭발 뒤를 대조해보기 위한 촬영여 행을 또 계획중이다. 올 여름에는 알래스카 연안의 촬영도 확정되어 있어 말 그대로 세계가 바로 집인 방랑생활이 계속될 것 같다. 최근 체리는 국 제원주민 보호연대에 회원으로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이 “ 사진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극지방 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라고 활달하게 설명하면서 ‘지구, 희망의 사람들’ 시리즈에 처음으로 선보인 장본인답게 `한겨레21'과 독자들의 안부를 물었다.
런던=권은정 통신원
101호 병사를 위한 병영 만드는 ‘러시아 병사들의 어머니회’
모스크바 중심가의 아늑한 골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병사들의 어머니회’ 사무실. 각종 소식들이 빼곡이 덮고 있는 벽은 1년 전과 다름 없이 아직도 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어머니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음 을 말해준다. 지난 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참전을 계기로 만들어진 ‘어머니회’는 소련의 해체와 체첸전 등으로 지난 몇년을 정말 정신없이 보냈었다. 지난해 찾았을 때와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겨레21'의 보도내용이 벽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달라진 것은 이것뿐만 아니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동안 러시아도 많은 것들이 양과 질에서 변화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점 은 어머니들의 애간장을 끓였던 체첸전이 사실상 일단락되었다는 점이다. 또 러시아 모병제도가 평소 어머니회의 주장대로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점도 사무실을 활기차게 만드는 요인이다. 비록 정치 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던 옐친 정부가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지만 체첸전 종식과정에서 해결사로 맹활약했으며 다수 어머니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레베트의 정치적 약진도 아직까지는 반가운 일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어머니들의 아픔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지난해 3월 시종일 관 은은한 미소로 언어조차 서툰 ‘이방의 아들’을 친절하게 대해주던 대변인 흐마코바 여사이 이마 주름은 더욱 깊어진 듯하다. 체첸전 종전 이후 몇 차례의 행불자 확인작업과 포로교환에도 불구하고 아들 알렉세이 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기 때문이다. 반면 대학생인 아들의 징병으로 속 을 태웠던 무르만스크 지부의 이리나 여사는 막내 아르촘의 군복무를 받 아들이기로 했단다. 다만 부대쪽의 배려로 1주일에 한 번 이상 면회 또는 외출을 통해 아들의 얼굴을 대한다는 전언이 있다. 조만간 여타 러시아 인권단체와 더불어 러시아 인권을 소재로 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흐마코바 여사는 ‘한국 어머니들’에 대한 안부도 잊지 않았 다.
모스크바=김일환 전 통신원
104호 노동하는 아이들의 빛, 고우리 푸라단 회장
“아이들이 공장에 가는 대신 학교에 갈 수 있기를, 아이들의 고사리 같 은 손에 해머 대신 펜을 쥐어 줄 수 있기를, 아이들의 얼굴에 배고픔에 절은 표정 대신 해맑은 동심을 돌려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랍니 다.”
96년 봄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네팔어린이노동자협회(CWIN) 회장 고우 리 푸라단(36)을 만났을 때 그가 열망을 담아 하던 말들이다. 97년 새로 운 봄을 맞으며 그의 간절한 꿈은 이루어져 가고 있을까?
‘뚜우 뚜우 뚜우.’
분명 CWIN의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전화기의 대답은 며칠째 한결같다. 가 난한 나라의 상징이다. 고우리 푸라단의 꿈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확인 하려는 계획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전화번호가 또 바뀐 것 임에 틀림없다. 결국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한 네팔 노동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네팔의 여기 저기에 전화를 하고 몇번의 확인 작업을 거 친 뒤에야 CWIN의 전화번호를 얻어주었다.
“고우리 회장은 지금 네팔 제2도시 포카라에 계십니다. 그쪽에 어린이 노동자 쉼터를 만드는 일 때문에 가셨어요.”
지난 3월7일 어렵게 CWIN과 통화를 했지만, 고우리 회장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어린이 집을 포카라로 확장하는 작업은 터 선정, 재정 마련 , 팀 구성 등등 만만치 않은 작업의 연속인데다가, 카트만두에서 포카라 까지는 버스로 꼬박 하루가 걸리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더욱 분주하게 만 든다는 것이다.
통화는 못했지만 그가 하루 1달러를 벌기 위해 어둡고 습한 팔찌 공장에 서, 카펫공장에서, 그리고 섹스산업 등에서 혹사당하는 아이들에게 희망 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제3세계 어린이 노동자문제는 제3세계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사 안이 아니다. 어린이 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사주는 선진국 사람들이 있는 한 어린이 노동자문제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한국의 젊은이 들도 이제는 자신만의 짊이 아닌 세계의 짊을 함께 져야 할 때가 되지 않 았을까?”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김재금/ 외국인노동자 피난처 간사
107호 남아공의 진실과 화합위원회
지난 77년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정부에서 경찰청장·법무장관·교도국장 등 3개의 직책을 동시에 가졌던 막강한 권력자 지미 쿠루거는 한 흑인 청 년운동가가 경찰 구금 중 의문사한 것에 대해 가볍게 코멘트했다.
“스스로 굶어 죽는 것도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 농담은 당시 흑인 청년운동가 스티븐 반투 비코가 체포돼 유치장에서 의문사했다는 보고에 대한 쿠루거의 반응이었다. 이 농담에 당시 집권 국 민당 인사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웃음들을 터뜨렸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4월부터 시작된 남아공의 과거 청산위원회격인 ‘진실과 화합위원회’는 스티븐 비코가 굶어죽은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무참하 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최근 밝혀냈다. 이 밖에 이제까지 진실위에 접 수·조사된 1만여건의 크고 작은 인권유린 사례는 대부분 아파르트헤이트 백인정권의 국가안전위·비밀경찰 심지어 전전 대통령 보타와 직접 관련 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인권유린 청문회가 시작되던 지난해 4월만 해도 백인들(기득권층)의 반응 은 냉담했다. 몇몇 경찰 수뇌들은 공동성명까지 내어 그들이 적법하고 인 권 존중 차원에서 업무를 수행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요즈음, 이렇게 인종차별 탄압의 진실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백인들도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진실위’의 ‘사면소위’에 사면신청을 내는 백인들도 최 근 크게 늘어 지난 2월 말 현재 최소한 6백여건이 접수된 것으로 전해진 다.
이렇게 진실위가 옛 정권이 직접 인권탄압에 관여했음을 밝혀내고 있지만 만델라 대통령은 또다른 고민에 빠져 있다. 과연 애초 ‘진실위’가 목표 로 한 국민 화합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우려다. 단적으로 최근의 한 여 론조사 결과 진실위의 공정성 여부에 대해서 37%의 백인들이 진실위가 편 파적이라고 지적한 반면 흑인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답변하지 않았다. 인 종간 인식의 편차가 큰 것이다.
법적 활동 기간이 올해 말까지로 돼 있는 진실위가 ‘진실’을 밝혀내고 ‘화합’에 이르는 길에 그래서 좀더 깊은 세계인의 관심을 요구한다.
요하네스버그=정해권 통신원
108호 자크 이브 쿠스토 선장
아흔을 바라보는 자크 이브 쿠스토(87) 선장이 지난 2월 심한 감기로 병 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프랑스 사람들은 한동안 근심이 그득했다. 20세 기 프랑스인 중 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진 사람이며, 피에르 신부(제103호 소개)와 함께 현재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인 이 노선장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너무나 각별하기 때문이다. 쿠스토 선장은 바로 인 류에게 바닷속 세계의 신비를 알려준 인물 아닌가.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극의 빙산에서 아마존강 바닥까지의 ‘지구의 아름다움’은 그의 발걸음에 빚진 바 크다. 그의 이름이 붙은 학교가 프랑스에서만 46개라는 것은 이 노 탐험가에 대한 애정을 바로 보여주는 지표다.
다행스럽게도 쿠스토 선장은 최근 다시 건강은 회복했지만, 현재 자택에 서 요양중이다. 지난해 쿠스토 선장에 관한 기사가 나간 뒤, 한국방송공 사, 환경운동연합 등에서 전화가 빗발쳤고, `한겨레21'의 주선으로 환경 운동연합에 의한 쿠스토 선장 한국방문이라는 약속이 성사됐다. 아직 자 세한 일정은 논의되지 않았으나 올해 안에 꼭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 은 일단 이루어졌다. 또한 쿠스토 선장 지휘 아래 탐사팀은 동해나 남해 등 한국 근해 탐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쿠스토팀은 탐사가능성을 타 진하기 위해 한때 한국 근해에 대한 자료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께에는 어린이용 환경·자연 주간지 `쿠스토 주니어' 한국어판이 발간 돼 쿠스토 선장은 우리에게 한결 낯익은 이가 되고 있는 듯하다.
파리=최연구 통신원
113호 이탈리아 장애인 박람회
지난해 5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제2회 장애인 박람회’를 조직했던 프 랑코 봄프레치는 최근에도 전화통화를 하기가 힘들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수백개 기업이 장애인 상품 전시와 홍보활동을 벌이는 장애 인 박람회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장애인 및 관계자에게 중요한 모임의 장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와 저의 동료들은 이 박람회 뒤 많은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무엇보 다 우리가 발행하고 있던 장애인들을 위한 잡지 `프릴리'의 내용을 장애 인뿐 아니라 일반인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도구로 만들 자신감 이 생겼습니다.”
그는 지금 오는 98년 5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릴 제3회 박람회를 준비 하고 있다. 장애인 박람회를 지난 96년에 이어 2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여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중요한 박람회로 자리잡게 할 계획이란다. 스스로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중증 장애인인 봄프레치는 이외에도 장 애인 관련 일이라면 늘 ‘앞서 나가고’ 있다. 이탈리아 관광부서를 상대 로 건물의 턱을 없애는 내용의 ‘장애인들의 건물진입에 대한 규정’ 제 정을 촉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남들은 제가 많은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누구나 그 자신이 아니면 하지 못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꼭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 으며 이 일이 많은 사람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데 만족합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이 장애인으로 장애인의 아픔을 잘 아니까요.”
하지만 그는 “앞으로는 장애인이 주최한 장애인 행사보다 일반인이 주최 한 장애인 관련 행사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인다. 이 지구상 의 인간은 모두 더불어살아가야 할 존재 아니냐는 것이다.
베네치아=김선아 통신원
119호 독일 ‘레클링하우젠 루르연극제’
몇십년 만에 유럽을 강타한 지난 겨울의 강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봄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있었다. 독일 ‘레클링하우젠 연극 제 준비위원회’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이들은 올해도 세계화와 유럽 통합 속에 고통을 더하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으로 다가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50년 전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고통받던 함부르크 시립극단에 석탄 을 준 레클링하우젠의 광부들과, 광부들에 대한 보답으로 연극을 선사한 연극인들의 그 마음을 올해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올해 레클링하우젠 연극제는 약 1백20여년 전 헨리크 입센이 갈파한 이른 바 ‘경제 테러’를 모토로 삼을 예정이다.
“새로운 ‘천년세월’의 어귀에 선 지금, ‘돈’이라는 요물은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단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합의의 과정도 윤리라는 가치도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지 오래입니다. 올해 레클링하우젠 연극제는 ‘노동자를 위한 연극제’답게 이러한 혼돈 속에서 무언가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연극제의 총감독 한스귄터 하이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한자락에서도 돈 이 주인된 ‘하나의 유럽’에 맞서려는 소중한 싸움의 흔적이 진하게 묻 어나온다. 올해는 출품작들의 경계도 훨씬 넓어져서 아프리카·남미의 작 품들도 소개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레클링하우젠 연극제의 ‘열린 성 격’에 걸맞게 이전보다 ‘야외무대공연’의 비중을 더욱 높일 예정이란 다.
97년의 봄은 장차 3억명이 넘는 전체 유럽을 ‘하나의 화폐’ 아래 묶어 두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독일인들에게도 마지막 인내 와 고통의 세월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연극제가 열리는 5월1일이 되면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레클링하우젠에서는 노동자들의 힘찬 외침이 울려 퍼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내지르는 힘찬 외침은 바로 이런 냉엄한 프로젝 트에 좀더 인간적인 따스함을 불어넣으려는 레클링하우젠 연극제의 소중 한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레클링하우젠=최우성 통신원
130호 동티모르 독립운동 이끄는 ‘모베레민족저항평의회’ 호주 총본부
20세기 최후의 식민지, 인구의 3분의 1이 학살당한 비운의 땅 동티모르.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폭압에 시달리는 동티모르인들에게도 지난 96년은 새로운 희망으로 기억되는 해였다. 독립운동의 구심 ‘모베레민족저항평 의회’ 대변인 호세 라모스 호르타의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이 ‘희망의 문 ’을 조금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평의회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동티모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한 편 동티모르 현지의 민중들도 평의회의 지도 아래 대규모 독립요구 시위 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여론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정책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가혹한 탄압 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월에 들어서자마자 호르타는 평의회 관계자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전 역을 돌면서 동티모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다양한 집회 및 이벤트 활 동을 벌였다. 이 순회활동을 계획하고 동행한 이넥스 알메이다 총무는 “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고 인도네시아의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일반대중의 열기는 대단했지만 그것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공식정책으로 반영되기 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런 상황은 오스트레 일리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국익만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국제사 회의 냉엄한 현실이 동티모르 독립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모베레민족저항평의회는 일단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광범위하 게 확산된 동티모르 독립지지여론을 실질적인 정책 및 외교적 압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97년 독립운동의 총노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각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결성된 동티모르 관련 인권단체들과의 연대 역시 같은 맥 락에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들은 그래서 ‘동티모르 대학살’날인 지난해 11월12일 결성된 ‘한국 동티모르 연대모임’의 각종 지원활동에 도 크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133호 ‘세타가야 행정개혁 110번’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지난 15년간 끈질기게 지방자치단체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일본 도쿄의 빵집아저씨 고토 유이치(48). `한겨레21'의 ‘지구, 희망의 사람들’이 그를 소개한 지 약 2개월 뒤인 올해 1월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내는 주간지 `아에라'는 ‘현대의 초상’이란 난에 그 를 소개했다. 이 난은 일본 사회를 이끄는 대표적 인물이나 특이한 인물 을 소개하는 코너다. `아에라'보다 먼저 소개할 수 있었던 점에 뭔가 ‘ 뿌듯함’을 느끼며 고토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불안해 했던 한마디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언제 `한겨레21' 번역한 것 보내줄 거예요.”
그를 다룬 `한겨레21'을 보내며 내용을 대충은 말해줬지만, 고토는 기념 으로 번역본을 갖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그에게 또 한마디를 들은 것이다.
‘세타가야구 행정개혁 110번’ 대표인 그는 공무원의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당당히 거대한 관료조직을 상대로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해왔다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한 빵집 주인의 15년 정성은 이미 일본 전체의 큰 흐름으로 변한 느낌이다. 도쿄도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들이 시민(시민단체)들의 ‘정보 공개’ 공격을 받고 속속 항복선언을 하 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일고 있는 중앙정부에 대한 정보공개법 제정 움 직임 역시 그의 활약에 기인하는 면이 많다. 또 그의 경험을 얻기 위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빵집문을 두드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언제나처럼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새벽 3시30분 에 나와 빵을 굽고 점심 휴식시간을 이용해 구청을 찾을 계획이란다.
“국민은 세금을 낼 의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아는 것도 역시 의무입니다.”
이 빵집 주인의 작은 활동은 ‘관료사회’ 일본을 ‘시민중심 사회’로 바꾸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일을 해낼 것이다.
도쿄=구영구 통신원
136호 반핵과학자 모임 ‘퍼그워시회의’
최근 복제양 돌리의 뉴스가 전세계를 강타하자 영국 언론이 ‘과학의 윤 리성’에 관한 자문을 얻으려고 가장 먼저 찾은 이가 조셉 로트블라트(88 ) 교수였다. 교수는 돌리를 만든 에딘버러 로슬린연구소의 윌머트 박사와 벌인 지상논쟁을 통해 과학의 지적 추구와 인류공동체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는 당연히 후자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과학자 이전에 먼저 한 시민이 돼야 한다”는 그의 천둥과 같은 경고를 영국 사회가 숨 죽이고 경청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렇게 지난 95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 노 과학자의 일정표에는 요즘도 여백이 전혀 없다. 지난해 12월 영국 런던에 위치한 반핵과학자모임인 ‘ 퍼그워시’ 사무실에서 `한겨레21'과 만난 이후 그가 펼쳐온 활동은 그가 얼마나 ‘바쁜 몸’인지를 잘 보여준다. 지난 1월 그는 웨스트민스터 의 회의 한 청문회에서 투옥중인 이스라엘 과학자 모르데카이 바누누를 위해 장시간 증언을 했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제조를 내부제보한 혐의로 무거 운 형을 받았던 바누누는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조국의 배신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과학자 양심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2월 들어서 교수는 핵탄 도 미사일 개발 억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의 워크숍을 주관했다. 이런 단기적 활동 외에도 핵무기 철폐를 위한 퍼그워시 회의의 두번째 보고서 발간이 그의 책임 아래 진행되고 있고, 군사연구개발의 결과를 평화적 목 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도를 제안하는 간행물도 계획중이다.
과연 90을 바라보는 이 노 교수에게 이런 열정을 불어넣는 힘은 무엇일까 .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다 이를 비판하고 뛰쳐나온 뒤 가져온 ‘인류공동 체에 대한 도덕적 책무’가 바로 그 밑바탕에 있는 힘이 아닐까?
런던=권은정 통신원
137호 베이징한국어학교
세상에는 위기 속에서 희망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들 의 희망을 볼모로 성장하려는 독버섯 같은 사람들도 있다. `한겨레21'의 보도 이후 베이징한국어학교의 황유복 교수(53·중앙민족대 교수)는 독지 가를 자처하고 접근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의 헛된 약속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이들은 대개 동포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친 것처럼 자처 하고, 학교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을 장담하면서 접근해 온다고 한다. 그 러다가 정작 일이 구체화되면 한국인학교의 합법성과 인맥을 다른 일에 이용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학교 관계자들을 허탈하게 만들곤 한다. 그러다 보니 “조국이 없던 시절의 독립운동보다 오히려 당 당한 조국이 있는 지금의 민족교육운동이 더 힘들다”는 자탄의 소리도 높다.
그러나 황 교장을 비롯한 뜻있는 지식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베이징 한 가운데 한국어학교 건물과 민족대학을 건립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 빠 른 속도로 한족에 동화되어가는 중국 내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길이 이 제는 민족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래도 `한겨레21' 이 자신들의 이런 염원을 따뜻하게 다루어줘 고맙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 고 황 교장은 최근에 변동된 일련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만, 모국에서의 일방적인 지 원 역시 더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독지가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서의 민족교육에 투자할 안목있는 투자가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 을 설립할 뜻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외국에 분교를 세울 계획을 가지 고 있는 대학 등과 합작할 의향이 있습니다. 학교를 세울 터는 이미 확보 해 놓았고, 매우 까다로운 중국 정부의 허가 문제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 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건물을 지을 돈입니다. 만일 우리에 게 이 돈을 투자한다면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을 모국 분들이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2세와 3세들이 충분한 민족교육과 과학교육을 받아 훌륭한 한민족의 일원으로 자리잡고 중국에서 가장 뛰어 난 공민으로 존경받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불신과 실망을 넘어서는 위대한 희망의 싹은 오늘도 이렇게 베이징에서 자라고 있었다.
베이징=김성환 통신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