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한-일관계, 망각의 강은 없다

다나카 히로시 교수는 1937년생으로 도쿄 외국어대학 중국학과를 졸업했 으며 현재 히토쓰바시대학 사회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나카 교수 는 또 ‘재일동포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모임’과 ‘중국인 강제연행을 생 각하는 모임’ 대표를 맡아 일본의 ‘과거사 청산’ 활동에 힘을 쏟고 있 다. 저서로는 `재일 외국인' `유족과 전후' `망상의 국제국가 일본' `외 국인의 지방참정권' 등 다수가 있다.

21세기의 일-한 관계는 과연 ‘불행했던’ 두 나라의 과거사를 씻고 미래 를 향해 재정립될 수 있을까. 아니면 현재와 같이 ‘가깝고도 먼 나라’ 로 남아 있을까?

21세기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지만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잠재해 있는 ‘ 과거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나는 일-한 관계의 특 성상 두 나라의 미래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개인적인 견해라는 형식을 빌려 일본의 과거 인식에 대해 두세 가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미래위해 과거 검증하는 역사인식 필요

전후 50년에 해당하는 95년 6월, 일본의 중의원은 ‘역사의 교훈에 비추 어 평화에 대한 결의를 새로이 하는 결의’를 억지로 채택했다. 여기에서 는 그 내용에 대한 논평은 일단 접어두고, 다른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 실은 같은 중의원에서 패전 직후인 1945년 12월 ‘전쟁 책임에 관한 결의 ’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전쟁행위를‘국제조약에 위 배되는 참혹행위를 한 형사범죄’로 표현하고 있다. 두 종류의 결의 사이 로 흘러간 50년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역사인식이 있어야만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에 따라서 2차대전이 종결됐다. 이 선언이 수용하고 있는 카이로선언에는 ‘대만·만주’를 중국에 반환 하며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이른 시일 안에 조선을 자주독립 국가로 한다”고 돼 있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출발점은, 대만·조선 등 의 식민지화 당시로 거슬러올라가 그 청산의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사진/정신대할머니의 절규. 일본은 국가적 배상과 사과를 외면한 채 국민기금이라는 편법으로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31년부터가 ‘15년 전쟁’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이에 따르 면 ‘만주국’은 소멸되지만 대만·조선 등은 식민지로 그대로 남게 된다 . 하지만 15년 전쟁 이전에 식민지화한 조선·대만 등을 포기한 것이 전 쟁에 이긴 연합국에 의해 ‘부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나 오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15년’이 아니라 대만 영유 이래의 ‘50 년’이 부정된 것이다.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은 네번 전쟁을 경험했다. 이 전쟁들은 거의가 천황 의 ‘개전 조칙(詔勅)’에 의해 시작됐다. 다시 말하면 일-청, 일-러, 제 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의 네 전쟁인데, 마지막의 조칙을 제외한 나머지는 ‘국제법의 준수’를 표방했다. 한편, 만주사변, 일화(日華)사 변(중일전쟁), 상하이사변과 같이 ‘사변’이라 불리는 것들은 ‘선전포 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쟁’과 구별된다.

1937년의 일화사변 당시 내각 서기관장(현재의 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양 군부(육군과 해군)는 선전포고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 이유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외국으로부 터의 군수물자 수입이 상당히 부자유스럽게 돼, 국방력에 큰 손실이 생기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제법을 무시한 것이다. 따라서 15년 전쟁 기에 위치하는 제2차 대전의 선전포고에서는 국제법 준수를 주장하지 않 았다. 나치독일과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일본은 당시 서구열강의 동남아시아 각 식민지에 군대를 파견해 미국·영 국·네덜란드 등의 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애초의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억압자를 물리치는 일본국으로 보였고, 또한 서구열강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역학 관계가 작동한 측면도 있었다.

일본이 ‘악마 같은 영미, 동아의 해방’이란 슬로건을 내건 것은 이러한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려 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독 립에 공헌했을까 하고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군 내의 인도 병사들에게 일본과의 합작을 요구했던 후지 하라는 다음과 같이 회술하고 있다. “인도 독립연맹의 신 서기장은, ‘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식민지 정책이나 만주·중국에서의 일본의 군사 행 동과 정책을 침략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고, 인도인의 눈에는 일본이 호 전적이며 침략적 성격으로 비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렬한 일침을 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민’에 빼앗긴 재일코리언의 권리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가 전쟁 뒤 재일코리언(재일동포) 문제에 대한 것이 다. 전후의 일본은 약 7년간의 미군 점령하에 놓여 있었다. 미국은 사전 에 점령연구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923년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 등에 대해서도 연구해 일본인에 의한 폭력과 사회적·경제적 차 별로부터 외국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1946년 2월13일 맥아더의 헌법 초안이 일본 정부에 제시되었는데 그 법의 제16조에 “외국인은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는다”고 명기되었다. 이는 그뒤 일반적인 평등조항에 흡수돼 “모든 자연인은, 일본 국민이든 아니 든, 법률 앞에서 평등하며, 인종·신조·성별·사회상의 신분이나 문벌 혹은 국적에 의한 정치상·경제상 혹은 사회상의 관계에서 차별당하지 않 는다”라고 고쳐졌다. 물론 이때도 애초 초안의 취지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해 3월6일 공표된 일본 정부의 헌법 개정 초안 요강에서는 ‘일 본 국민이든 아니든 관계없이’와 ‘국적’이 제외되었다. 그리고 11월3 일 공포된 현행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는 평등하며(14조)”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국민’이란 ‘일본 국적 보유자’로 해석돼, 외국 인의 권리보장은 ‘미완의 점령개혁’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헌법 25조에는 또한 “국민은 최저한도의 문화적 생활을 누릴 권리를 가 진다”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싼값에 공급하는 공영주택 문제 에서도 건설성은 “그 목적이 ‘국민생활의 안정’에 있으며 헌법 25조의 이념을 구체화한 것이지만 그 권리는 일본 국민만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 서 외국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고 회답했다(1954년).

재일코리언(재일동포)은 1952년 4월28일 일본이 미군의 점령을 벗어난 날 에 ‘외국인’이 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다. 건설성의 회답 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국민’이라든지 ‘국적 ’이란 단어에 의해 잘려나간 대부분의 외국인이 재일코리언이었다는 것 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서 이러한 ‘배외주의’는 결정적 일침을 맞는다. 그러나 그것은 의외로, 재일코리언이 아니라 ‘1973년 베트남 난민’에 의해 이 루어졌다. 더욱이 같은 해에 선진6개국 정상회담(G6)이 발족되어, 일본이 그 일원이 된 점도 이런 변화의 한 배경이었다. 국제적 비판을 받은 일본 은 79년에 국제인권규약에, 81년에는 난민조약에 가입할 수밖에 없게 되 었다. 이러한 조약가입에 따라 일본의 사회보장제도에 ‘내외인 평등’이 겨우 실현된 것이다.

앞서 말한 건설성도 80년에 “제반 정세의 변화에 비추어, 외국인이라 할 지라도 일본 국민에 준하여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라며 기존 태도를 크게 수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변화가 한-일조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베트남 난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특히 기억돼야 할 부분이다.


차별 철폐 주장했던 일본정부가 ‘인종차별’

재일코리언의 문제는 일본의 재외일본인 정책과도 비교돼야 한다. 차별 철폐에 대해서 일본은 과거 세계에 인종차별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던 적 이 있다. 1919년 1차대전 뒤의 베르샤유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이 발족되 었고, 그 규약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는 “조약 체결국은 연맹원인 모든 국 가의 인민에 대해서 인종 및 국적 여하에 의해 법률상 혹은 사실상의 어 떤 구별을 제정함없이 그 어떤 점에 있어서도 균등·공평의 처우를 제공 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문구를 규약에 넣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부결되었지만, 1919년 2월에는 도쿄에서 인종차별 철폐대회가 열렸고, 각종 매스컴도 일제히 일본의 정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일-미 이민마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정의’는 당 시 일본 이민이 미국에서 받는 차별·냉대에 대한 고려로부터 시작된 것 이다. 그때만 해도 일본은 허약한 경제에 많은 인구를 안고 있어, 이민을 내보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4년 미국이 배일 이민법을 제정했으며 일본 이민은 중남미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의 양친이 고향 구마모토를 떠난 것도 이때였다. 페루의 국가원수는 일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재일코리안의 대부분이 외국국적임에도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현재와 과거, 안과 밖의 시점에 서서 일본 자신의 미래를 전망하지 않으면 21세기의 일-한 관계는 새롭게 열리 지 않는 것이다.

번역=구영구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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