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초라한 앨범, 화려한 싱글?

(사진/현재의 싱글 레코드는 이미 성공을 거둔 뮤지션들의 사전 홍보용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최근 싱글을 내놓은 삐삐 롱 스타킹.)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영국의 음악산업에 관한 글을 보다가 “영국은 미국보다 소득수준이 낮아 서 싱글 레코드(이하 ‘싱글’로 약함)를 발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어?’라는 감탄사를 뱉었다. 요 즈음이 아니라 60년대 후반의 얘기니까 한국이 영국보다 소득수준이 높다 고 할 수는 없을 텐데도, 한국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싱글 레코드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무언가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듯하다. 작년에 시나위가 싱글을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들어 넥스트와 삐삐 롱 스타킹이 싱글을 발매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내용물의 품질이 어떤지를 따지기 앞서, 일단 쌍수로 환영할 현상이다(불행히도 오늘은 이들의 ‘음악적 질’에 대해 논할 여유는 없을 듯하다).


위험부담 줄여 대중성 확인한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한국에서 음반과 앨범은 동의어였다. 물론 이때 앨범 이란 ‘품질’이라기보다는 ‘포맷’의 의미다. 대부분의 앨범에서 들을 만한 곡은 한두 히트곡에 지나지 않는다. 전곡을 다 감상할 만한 품질을 갖춘, 즉 정말 ‘앨범’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음반은 그리 많지 않다. 나 는 초라한 앨범보다는 화려한 싱글(아니 알찬 싱글)이 좋다. 물론 이번 시나위의 신보처럼 자그마치 16곡을 담아서 본전생각 안 나게 하는 화려 한 앨범은 더 좋다.

이런 말을 ‘한국의 뮤지션들은 수준이 낮다’라는 주장으로 오해하지 말 기 바란다. 나는 ‘히트 가요’ 이외에는 지속적 생명력을 누리는 음악이 많지 않은 나라에서 ‘효율적 자원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경제 학적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산업에 서도 ‘한탕주의’가 팽배해 있다.

심하게 말한다면, 음반을 1백장쯤 만든다면 한두개 정도만 밀리언셀러가 되는 것을 바라는 관행이 구조화되어 있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지 만, 우리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음반을 만드는 재료를 다른 부문에 배분 한다면 국민소득도 국부도 모두 증진될 것이다. 공들여 만든 음반을 무더 기로 폐기 처분하는 일은 환경보호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건조한 경제학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앨범이라는 포맷은 제 작비가 높고 많은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판매 ‘리스크’가 크다. 많 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앨범을 발표했지만 시장의 반응이 시원찮을 경 우, 한 평론가가 ‘백조의 노래’라고 표현했듯 그것으로 음악 활동을 중 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한판승부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금 언은 잘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싱글 포맷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싱글은 뮤지션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 시장 의 단기적 반응을 살펴보고 자신의 음악적 지향을 가다듬는 기회를 제공 할 수 있다. 둘째, 합리적 집계 기준이 미비한 채 엽서집계와 방송횟수 등에 좌우되는 등 ‘말도 안 되는’ 히트가요 차트를 더욱 합리적으로 만 들 수 있다. 레코드 판매량이 ‘대중성’의 가장 객관적인 기준인 것만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첫번째와 관련되는 말이지만 앨범의 품질을 좀더 높일 수 있다. 싱글을 통해 ‘장사가 되는’ 음악을 하고 앨범에는 ‘하 고 싶은’ 음악을 몇 곡 수록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정리하여 말한다면 싱글 차트순위 및 판매량은 ‘단기적 대중성’을, 앨 범 차트순위 및 판매량은 ‘장기적 영향력’을 가늠하도록 분리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찝찝한 심정과 어색한 모습으로 TV가요 순위 프로 그램에 출연할 필요도, 지하의 연습실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방 송사와 음반사와 도매상을 원망할 필요도 다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름다운 망상’일 뿐이다. 오늘 소개한 싱글들은 중요한 출발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한계도 명확하다. 정식 데뷔하려는 뮤 지션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성공을 거둔 뮤지션들이 ‘사전 홍보용’ 비 슷하게 만든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가격이 비합리적으로 책정되어 있 다. 이들 싱글 CD의 가격은 적어도 6천원 이상인데 이는 앨범, 테이프보 다 비싼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음반을 구매하기 전 탐색 기회를 제공 해주고 있는 ‘길보드 테이프’를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 관점에서는 ‘공 자님 말씀’이지만, 경제학의 냉정한 관점에서는 ‘비합리적 기대’이다.

한 명의 팬의 입장에서 음반 구매는 생각보다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음악 을 듣고 ‘저 노래 괜찮네. 들을 만하네’하는 정도로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은 드물다. 속된 표현이지만 음악을 듣고 ‘환장해서 미쳐 날뛰지’ 않으면 주머니에서 돈이 잘 나오지 않는다. 또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가 정용 소프트웨어들, 예를 들어 비디오 테이프, 컴퓨터 게임 등이 음반의 강력한 ‘대체재’로 등장한 지 오래다.


합리적 가격 정해야 구매층 확보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기에는 한국의 음반 포맷은 너무 획일 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나는 ‘싱글 예찬론자’가 아니라 ‘포맷 다양화 론자’이다. 책을 예로 들면 주머니에 넣고 볼 수 있는 문고본도 필요하 고, ‘하드커버’로 단단히 제본된 것도 필요하고, 평생 소장용이자 서가 의 미관을 빛내기 위한 전집류도 필요하다.

문고본 한권을 사듯, 혹은 햄버거 한개를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듯 음반 을 구매할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6천원의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 며 그 이유는 현재 음반 유통구조가 어떻구 도매상이 어떻구 등등에 대해 말해야 되는데, 이건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보버스’에 올라타 있는 기분. “오어오오어 무슨 얘길 해야 할지 / 오어오오어 아무 말도 할 게 없는데…”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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