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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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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질 마무니/출연 뱅상 카셀,로만느 보링거
최미애/ 영화평론가
때로는 한장의 영화 광고 포스터가 영화관람 동기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 하기도 한다. 높이 치솟은 아파트와 거미줄처럼 뒤엉킨 아파트 유리창들 을 배경삼아 뒤엉켜있는 한 남자와 두 여자. 완벽한 미학적 구도와 격렬 한 모노톤으로 채색된 포스터 안에 도열해 있는 이들은 크리스티앙 디오 르 제품의 모델로 널리 알려진 모니카 벨루치와 마티외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로 영화마니아들의 은밀한 스타가 된 뱅상 카셀, `싸베지 나이트', `고백' 등의 영화로 소외감과 고독함이라는 정서를 대변해 온 프랑스의 명배우 로만느 보링거이다.
이 포스터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파트로 상징되는 도시에서의 삶의 체험 을 떠올리게 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의 경험보다는 배반이나 소외, 고 독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랑의 경험을 자극한다.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 을 맞이하는 사랑을 예감하게 하는 화면 안 소실점을 향해 관객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TV광고 감독출신인 질 마무니는 그의 감독 데뷔작인 `라 빠르망'을 통해 점차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광고와 영화가 혼성교배되는 지점을 체 험하게 한다. 그는 파리의 아파트와 카페, 도심거리와 극장과 같은 극히 일상적인 공간들에서 그가 사용할 이미지들을 채취한다. 그는 이 익숙하 고 평범한, 그래서 별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킬 것 같지 않은 이미지들을 광고가 사용하는 빠른 편집기법과 찰나적인 인상을 남기는 촬영기법으로 윤색한다. 그의 손에서 평범한 도심공간의 이미지들은 사람의 정서를 자 극하는 상품화된 화면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도시인들의 삶의 비밀을 내 장하고 있는 밀림으로 변신한다.
결혼을 앞둔 매력적인 청년 맥스는 일본 출장을 앞두고 들른 어느 카페에 서 우연히 옛 애인 리자의 자취를 발견한다. 그는 리자가 떨어뜨리고 간 호텔 열쇠를 단서삼아 홀연히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리자의 뒤 를 추적한다. 그의 의문은 왜 2년 전 그토록 사랑했던 리자가 아무런 해 명도 없이 자기 곁을 떠나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맥스는 계속해서 간발의 차이로 리자를 놓치고 단지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콤팩트, 빨간 하이 힐, 향수, 호텔방 등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뒤얽힌 세 남녀 의 기구한 사랑의 기억들을 마술처럼 불러일으키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 한다.
감독은 단지 왜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곁을 떠났는지만을 알고 싶어하는 맥스와, 맥스와 리자 사이의 사랑을 질투하며 리자 대신 맥스의 사랑을 받고 싶어했던 앨리스, 앨리스의 방해로 그들의 사랑이 빗나간 줄은 전혀 모른 채 자포자기 심정으로 돈많은 유부남과 사귀는 리자의 서로 다른 세 가지 시점으로 과거와 추억을 직조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 되는 이 과거와 현재의 엇갈림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미스터리와 스릴 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라 빠르망'은 동시대 영화관객들이 체험한 다양한 영화들을 생각나게 하 는 영화이다.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제니퍼 제이슨 리와 브리짓 폰다가 열연했던 `위험한 독신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 림' 같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3부작 `세가 지 색-블루, 화이트, 레드' 같기도 하다. 그러나 `라 빠르망'은 앞의 어 떤 영화와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단지 이 영화는 도회적인 삶을 살아 가는 젊은 영화관객들의 감수성을 민감하게 자극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 인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것들의 표피적인 이미지를 탁월한 광고적 감각으로 집약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허무한 분위기를 지닌 현대인의 사랑을 얘기하되 절대 내러티브에 얽매이 지 말고 이미지로 표현하기, 애정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그로 인해 파생 되는 비극을 말하되 그 비극의 원인을 골치 아프게 추적하지 말고 가벼운 심리게임으로 만들기,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를 만들되 철학적이고 지적 인 분위기로 멋지게 포장하기. 이런 것들이 바로 광고를 닮은 영화, `라 빠르망'의 전략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