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대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한국정치 대안을 찾는 진통

(사진/한국정치의 대안은 김대중과 김종필의 연대? 패권적 지역주의에 맞선다는 수평적 정권교체론에 대한 정치학계의 학술적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역간 수평적 정권교체론은 현단계 한국정치의 대안인가?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연합’ 등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대 선전략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수평적 정권교체론’(여에서 야로의 정권교체)이 정치학계의 뜨거운 찬반논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97년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된 이 논쟁은 앞으로 정치일 정 전개에 따라 정치권과 학계뿐만 아니라 대선참여방식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재야, 시민, 노동운동 등 진보운동 진영으로 논쟁의 지형을 넓혀갈 것으로 보여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진보진영까지 논쟁에 합류할 태세

‘수평적 정권교체’란 한 정당 내에서 집권자가 후계자를 선택해 정권을 넘겨주는 ‘수직적 정권교체’의 대안개념으로 집권당이 여당에서 야당으 로 교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적으로는 특정지역의 ‘패권적 지역주의 ’에 대항하는 나머지 지역들의 ‘저항적 지역주의’가 연합해 정권을 쟁 취하는 ‘지역간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수평적 정권교체론이 정치학계의 ‘학술적 논쟁’으로 표면화된 것은 서강대 정외과 손호철(45) 교수가 최근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김대중(DJ ) 총재의 대권4수를 합리화하는 정략적 발상으로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 인 3김 중심의 사당(私黨)정치와 지역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정면비 판하고 나서면서부터이다. 손호철 교수는 지난해 12월 한국정치연구회 기 관지 <정치비평> 창간호에 발표한 논문 ‘수평적 정권교체, 한국정치의 대안인가?’, 지난 2월 말 펴낸 정치평론집 <3김을 넘어서> 그리고 <창작 과비평> 봄호 권두좌담, 월간 <말> 3월호 기고 등을 통해 수평적 정권교 체론자들의 주장을 “지적 사기”라고까지 매섭게 몰아붙였다.


(사진/저항의 논리인가, 사육의 논리인가.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두고 극단에 선 찬성론자 동국대 황태연 교수(왼쪽)와 반대론자 서강대 손호철 교수.)


수평적 정권교체론은 DJ의 대선전략의 일환으로 구상된 뒤 ‘친국민회의 정치학자’로 분류되는 길승흠 전 서울대 교수(현 국민회의 의원), 나종 일 경희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등이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손 교수와 서울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 선후배 사이. 또 정치학자는 아니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활발히 사회비평을 하고 있는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가 최근 저서 <인물과 사상 1>에서 손교수의 비판을 “정치(학)적 미숙아의 YS 편들기” 등으로 맹렬히 비판 하면서 일반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손 교수는 이들 중에서 황태연(42)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가 지난해 작성 한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총선관련 문건 ‘지역주의와 민주주의’ 가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보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비판론을 전개하고 있어 이 논쟁은 손-황 두 교수의 주장과 비판을 중심 으로 일단 불이 붙은 상황이다.

손 교수와 황 교수는 진보적 소장 정치학자들의 연구단체인 한국정치연구 회의 회장과 부회장 사이로 손 교수가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비판한 <정치 비평> 창간호에 황 교수는 수평적 정권교체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논 문 ‘한국의 지역패권적 사회구조와 지역혁명의 논리’를 나란히 발표해 이미 본격적인 논쟁을 ‘예고’한 바 있다.


“한국 사회구조 전면적 변화 이룬다”

먼저 수평적 정권교체론의 근거를 황 교수의 글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자.

한국의 정당정치는 싫든 좋든 지역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주 의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로 무조건 이를 백안시하는 태도는 지역 패권주의 고착화에 기여하는 제2의 지역패권주의다. 한편 지역주의에 기 반하여 37년간 지속된 영남지역 패권주의는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구조를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현 김영삼 정부의 PK 지역패권주의는 이런 역대 군 사정권의 패권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따라서 현단계 한국정치의 1차적 과제는 바로 ‘지역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PK 지역패권주의에 맞서 ‘저항적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지역대표 정당들이 연대하는 ‘상 층연합’과 영남노동자계급과 진보적 지식인 세력이 저항적 지역주의의 핵심 정당인 ‘호남당’을 지원하는 ‘하층연합’을 이룸으로써 지역패권 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를 진정한 의미에서 지역등 권을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지역문제를 완화-해소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

수평적 정권교체론자들은 이런 지역간 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만이 정치이론상으로나 현실정치상으로나 한국정치의 발전을 이룩하는 올바른 방향이기 때문에 그 하위의 문제들, 즉 자민련 등 유신·5공 잔존세력과 의 연합, 기득권층 포섭을 위한 정강정책의 보수화 등은 전술적으로 용인 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는 논리를 정치선진국들의 지역연합 사례를 들어 전개하고 있다.

황 교수를 비롯한 수평적 정권교체론자들은 수평적 정권교체가 가져올 정 치적 효과로 △정당의 정치적 자생력 신장을 통한 민주적 정당정치의 확 립 △정치타락 혁파 및 정치도덕 확립 △보수-진보정당 구도의 선진적 정 치질서 확립 등을, 사회·경제적 효과로는 △장기집권에 따른 정경유착의 이완 △대중들의 경제적 발언권 제고 △시민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관주도 행정의 약화 등을 가져와 결론적으로 한국 정치 사회 경제구조의 전면적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같은 수평적 정권교체론은 DJ의 대선 야당단일후보 및 정권쟁취라는 국 민회의의 정치전략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으며, 민주화운동 세력이 주 축인 국민회의와 유신·5공 잔존세력인 자민련과의 연대-연합을 지원하는 논리로 제공되고 있다.


‘야권 연대·연합’의 명분 제공

이에 대한 손호철 교수의 비판은 단호하다. 손 교수는 수평적 정권교체론 자들이 DJ의 대권 4수를 전제로 한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 평적 정권교체의 효과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학자로서 는 지적 사기나 다름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손 교수의 비판을 들어보자.

평화적인 정권의 수평교체는 중요한 과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민 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신한국당에서 자민련으 로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그 정권이양의 형식만으로 민주주의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절차적 정당성뿐 아니라 내용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3당통합 을 본받은 유신·5공세력과의 ‘야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가 정치도 덕을 확립할 것이란 주장은 기이한 논리이며, 수평적 정권교체가 보수-진 보의 선진적 정치질서를 가져온다는 주장도 아전인수일 뿐이다. 또 현재 와 같은 보스 중심의 사당정치를 존속하는 한 수평적 정권교체가 정경유 착을 완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경유착의 여야 공평확산을 낳을 가능 성이 더 높다. 지역문제가 한국정치의 심각한 문제라는 점에 이의가 없다 . 그러나 문제제기가 정략적이다. 지역문제의 최대 책임자는 영남지역 패 권주의자들이지만, 87년 야권분열을 낳은 DJ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경상도는 지역패권주의, 호남은 저항적 지역주의, 군사정권과 YS는 가해 자, DJ는 피해자라는 단순도식은 지역주의 역사를 왜곡하는 비과학적 인 식이다. ‘호남문제’의 해결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DJ의 대 권문제와는 분리되어야 한다. 호남의 정당한 저항적 지역주의가 더이상 D J의 대권수단으로 전락하여 지역주의라는 이름으로 매도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지역주의를 이용한 정권교체는 지역패권주의의 악순환만을 낳 을 뿐이다. 진정한 정치발전, 즉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 등 한국정치의 선진화는 구시대 정치의 유산인 3김의 사당정치를 청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전면적 재편을 가져올 것이라는 수평적 정권교체론자들의 주장은 수평적 정권교 체의 효과를 사실 이상으로 과장한 것이다. 오히려 수평적 정권교체론의 효과를 진정으로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DJ가 2선으로 물러나고 범민주야당 세력이 연합해 제3후보를 내 지역패권주의와 맞서는 것이 옳다.


“반민주세력과 야합해 지역주의 강화”

손 교수 등 비판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진정한 의미의 수평적 정권교 체는 3김시대를 극복하는 ‘제3후보론’이며, DJ를 상정한 수평적 정권교 체론은 위인설관식의 사후정당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 교수의 비판의 저류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지역주의 폐해의 타 파를 명분으로 지역연합을 내세운 수평적 정권교체론은 오히려 지역주의 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한국의 지역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질곡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생각이란 인식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저항적 지역주의의 핵심 지역인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회의가 반민주세력과의 ‘야합’을 통해 대권을 추구하는 데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길 승흠 의원은 수평적 정권교체는 시대적 요구이며 수평적 정권교체시 정권 수임자로서 DJ를 공개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 는 현실적으로 DJ만한 정치적 리더십을 가진 대안이 없기 때문에 DJ로의 야권후보단일화가 문제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손 교수 등 비판론자들이 수평적 정권교체론자들의 주장을 바로 DJ집권 을 위한 ‘신판 비판적 지지론’으로 ‘격하’하는 것도 이런 점들 때문 으로 보인다.

손교수는 최근 수원과 인천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DJP 공조로 야권후 보가 모두 승리한 것이 곧 DJP연합의 정당성을 국민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오히려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DJP연합의 환상을 강 화시키는 쪽으로 해석하는 한 15대 대선전의 지자제선거처럼 여당에게는 전화위복, 야당에게는 전복위화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손 교수 등의 이런 비판에 대해 수평적 정권교체론자들은 한마디로 “정 치적 패배주의와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정치학자로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공박하고 있다. “근거없는 DJ배제론에 매몰돼 결과적으로 YS를 도와줘 정치발전과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오히려 가로막는 주장 ”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손 교수가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인 지역문제 에 의도적으로 눈감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역패권주의의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황 태연 교수는 손 교수의 비판에 대한 재비 판의 성격을 띤 저서 <지역패권의 나라>(가제)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진보진영 대선전략의 이정표 구실

두 진영의 논쟁은 현재로서는 접점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논 쟁은 결국 단기적으로는 대선결과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대선 이후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정을 받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러나 대선이 임박할 때까지 이 논쟁은 대권향배를 점치며 합종연횡을 꿈 꾸는 정치권, 정치적 진로를 고심하는 재야, 노동, 학생운동 등 진보진영 의 대선참여전략에 일종의 이정표 구실을 할 것이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 의 표면적 논쟁 밑에서 이미 거대한 화산활동 같은 논쟁의 불씨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국민회의는 내각제 수용시사로까지 DJP연합을 밀어붙이고 있고, 수평적 정권교체비판론진영은 범민주후보 도출을 위해 제반 민주세 력이 총참여하는 선거대책기구의 조속한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 진보운동권에서도 대선레이스는 시작됐다. 수평적 정 권교체론을 둘러싼 논쟁은 그 신호탄이다.

이인우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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