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우리맛 기행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해남 천일식당 한정식

전라남도 해남을 생각하면 영암과 목포, 강진 등이 차례로 떠오르고, 다 시 바다쪽으로 진도와 완도를 중심으로 작은 섬들이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해온다. 해남은 이처럼 남도의 이름난 고장들이 사방으로 닿아 있는 교 통의 요충지다.

진도와 완도를 가려면 반드시 해남을 거쳐야 하고 목포와 영암, 강진이 거의 비슷한 거리로 이어진다. 그런 지리적 조건으로 해남 장거리에는 남 도의 특산물들이 없는 게 없이 나고, 읍내 이름난 음식점들은 물론 일반 가정집에 이르기까지 찬이 다채롭기로 이름나 있다.

해남으로 향하는 남도의 들녘은 지금 봄이 한참 무르익고 있다. 민틋한 들밭은 한뼘이나 자란 보리싹이 곱게 빗어놓은 듯 초록빛 줄무늬로 수놓 아지고, 특산물로 재배되고 있는 마늘밭들은 벌써 밭이랑을 가릴 만큼 파 랗게 물결을 이룬다. 읍내 장거리에도 이미 봄나물과 봄철 해물인 전어며 조개류들이 바구니마다 가득가득 담겨져 계절감이 차고 넘친다. 이런 때 남도의 별미를 찾아 떠나는 나들이는 일년 중 어느 때보다 각별하다. 봄 을 찾아가 오감으로 만끽하는 기분이다.

해남에서 제일간다는 천일식당은 장터에서 불과 50여m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집이어서 진도와 완도, 대둔산과 토말 등 남도여행 을 나서면 반드시 여행수첩에 챙겨가는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90 년 <무등일보>에 ‘67년된 전라도 맛의 원조’라고 소개된 액자가 걸려 있듯이 전국의 방송과 신문, 잡지에 거의 안 난 곳이 없을 만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음식은 그 맛의 내력을 좀더 확실하게 알고 가면, 더욱 깊 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천일식당(0634-536-4001)은 정확히 1924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처음 문을 연 박씨 할머니의 대를 며느리인 이정례 할머니가 이어오다가 7년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손자며느리인 오현화(39)씨가 시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3년 전부터 전수하여 올해로 10년째에 접어든다. 여인 3대 73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전통의 음식점인 셈이다.

긴 내력과 함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맛이 어디서 왔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주방에는 원조인 박씨 할머니에게 직접 찬 다루는 법 을 배운 맹상신(74)할머니가 아직 주방일을 돕고 있고, 그 밑에서 30년을 함께 일해온 박추자(60)씨가 찬을 책임지고 있다. 또 언제나 장작불로 짓 는 밥은 올해 72세 된 김차권 할머니가 역시 30년이 넘게 담당해오고 있 다. 지배인이면서 떡갈비를 맡고 있는 박남수(40)씨도 일곱살 때 이 집에 와 작은 일부터 시작해 20년이 넘게 떡갈비를 맡아오고 있는데, 저축왕으 로 뽑혀 국민표창을 받기도 했다.

음식맛은 손맛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하다. 누구나 한 가지 음식 에 전문으로 매달려 30년이 넘게 일해 양념이 듬뿍 밴 손들이다. 그래서 이 집 밥은 언제나 금방 뜸들여 퍼낸 맛이다. 젓갈은 간이 완전히 빠진 소금으로 직접 담가 알맞게 익어야 내는데, 그 무치는 솜씨에 따라 맛이 한번 더 우러난다고 한다. 이렇게 손질한 젓갈류로 토하젓과 석화젓, 자 해젓, 밤젓(전어창젓) 등이 오른다.

30여 가지에 이르는 찬에는 보리의 새순을 다듬어 끓인 보릿국과 쑥국, 냉이와 달래, 바지락이 들어간 된장찌개, 제철을 맞기 시작한 전어회와 게장, 그리고 해초류로 감태와 파래, 생미역, 해파리무침 등이 있다. 어 느 하나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울 수 있다. 천일식당의 맛을 10년 동안 지켜온 주인 오씨에 의하면 ‘우리집 맛은 시할머니의 소박한 철학 을 바탕으로 대를 이어가는 유산’이라고 표현한다.

한번 이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 평생 한가족처럼 온정을 베풀어야 하고, 손님상에 오르는 음식은 정성과 함께 인색한 맘으로 내면 안 된다는 것, 또 누구나 한 가지 일에 전념하도록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봄빛 가득 찬 남도 여행길의 필수코스

‘밥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한끼니를 맛있게 포식하고 나면, 젊었을 때는 즉석에서 살이 오르고 늙은이들은 생기가 치솟는다고 한다. 그만큼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늘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은 건 강하게 마련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어쩌다 입에 맛는 음식을 만나 점심 한끼를 잘 먹고 나면 하루가 거뜬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구수한 보릿국, 입에 짝 붙는 젓갈, 고소한 전어회, 싱싱한 해초들, 봄나물 향이 가득한 된장찌개, 고슬고슬한 쌀밥 등 봄의 미각을 가장 확실하게 담아내는 데는 역시 남도의 한정식을 따를 것이 없 다. 이 봄에 입맛이 나거든 해남으로 가라고 권하고 싶다. 대둔사(대흥사 ) 장춘계곡은 봄빛이 가득 찼고, 절 마당의 동백은 만개해 툭툭 떨어지고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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