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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3월20일 제 149호 한겨레21

봄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봄입니다. 제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아시는지요. 아니 제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아시는지요.

눈보라와, 그 눈보라를 끌고 캄캄한 허공으로부터 달려온 바람이 온 들을 덮었을 때, 사람들은 저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흙빛으 로 변한 이파리를 머리에 쓰고, 대지에 바짝 엎드려, 그 눈발을 견디면서 , 원뿌리 밑에 살아 있었습니다. 개울도 강물도 꽝꽝 얼어붙어 바다로 가 는 모든 길들이 막혔을 때도, 저는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 숨죽여 흐르며 산골짝과 강줄기를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겨울 내내 함성을 들었습니다. 들판의 풀처럼, 물가의 돌처럼, 많은 이들이 일어서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방안에 갇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제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몸을 사리는 사람들과도 달랐습니다. 겨울바람이 몰아 치면 함께 따뜻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제 몸을 감쌀 털옷을 마 련하기에 바쁜 그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한겨울 내내 저는 그들과 함 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어붙은 산골짝, 논둑, 밭고랑에 뿌리내려 자기 자리를 지키며 북풍 한설과 싸우는 풀과 나무들 같았습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잠들지 않 고 깨어 있어, 마침내 그 얼음을 녹이고 들판을 가로질러 온 산천을 깨우 는 물줄기 같았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성당의 종소리보다 멀리 퍼져갔 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따스한 자리에 앉아 봄 을 구걸하지 않았고,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원칙없는 해빙을 요구하지 않 았고, 씩씩했습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를 불러낸 이들은 바로 그들이 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땅의 진짜 주인임을 압니다. 아직 일일이 통성명을 하지 않아 이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땅에 따스함을 불러오는 건 제가 아 니고 그들임을 압니다.

저는 지금 낮고 높은 산들을 넘어 여러분들 가까이 와 있습니다. 푸른빛 을 되찾는 씀바귀와 꽃다지의 모습으로 와 있고, 회색의 나무줄기를 연두 색으로 바꾸는 가지 끝 여린 줄기로 와 있습니다. 눈을 들어 찬찬히 이 나라 산천을 살피는 이들은 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 창문가 에 심어져 있는 모과나무의 여린 눈으로 열리고 있고,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마을 산수유나무 샛노란 가지에도 앉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희망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희망이라 고 생각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때가 되면 나타나는 제가 아니라, 손에 손 을 잡고 숲을 이루어 겨울에 맞서는 여러분들이 희망입니다. 여러분들이 깨어 있고, 살아 움직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때 이 땅에 희망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사랑하고 기다 리듯 저도 여러분들 곁에 늘 함께 있습니다. 저는 봄입니다.

도종환/ 시인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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