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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3월20일 제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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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 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수복 ` 봄비'에서)
봄 내음이 알싸하다. 남녘 바닷가엔 벌써 봄이 무르익었다고 한다. 거제 도 동백꽃은 벌써 피고지기를 몇 차례. 점점 쪽빛을 띠어가는 물 위로 빠 알간 꽃 그림자를 드리운단다. 꽃갈이 고개를 넘을수록 빛은 더욱 진해지 고. 모래밭에선 맑은 바다에서 따 올린 돌미역이 파랗게 말라간다. 마악 물질을 하고 나온 해녀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골집에도 봄이 찾아들었을까. 어릴 적 이맘때면 뒷산에 쑥 향기가 진했 는데. 엄마랑 누이랑 한소쿠리 가득 쑥을 캐던 기억이 선명하다. 볕바른 논두덩엔 달래며 냉이도 푸짐했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나물을 캐고 집 에 돌아오면, 그새 꽃을 피운 개나리와 진달래가 반겼다. 해마다 맞는 봄 이지만, 향수가 새롭다.
봄은 개나리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서귀포(3월15일)에서 북진을 시작한 다. 부산(3월16일)을 거쳐 대구(3월20일), 광주(3월26일), 대전(3월27일) 을 지나면 마침내 서울(3월31일)에 꽃소식이 닿는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4백40km를 16일 동안 날아 올라오는 셈이다. 시속 1.1km. 더딘 품새가 조 금은 안타깝다. 그래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올라오는 게 대견하다.
농심은 벌써 바쁘다. 손길이 잠시 떠나 있던 농기구도 살피고, 논밭도 둘 러본다. 요즘 날이 가물어 속이 상한다. 대지를 흠뻑 적셔줄 봄비가 그립 다. 하지만 냉기가 풀린 땅 밑에선 지력이 꿈틀댄다. 갈아엎은 흙덩이 사 이에 모습을 드러낸 풀뿌리도 제법 물이 올랐다. 햇살받기를 하는 잡초의 무리가 농부의 힘줄을 긴장케 한다. 여기엔 무얼 심을까.
도시는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서울시청 앞 분수대 화단엔 삼색제비 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꽃집의 봄은 더욱 화려하다. 이름마저 고운 온갖 봄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성큼 화사한 빛을 띠어간다. 올 봄엔 녹색 계통의 색깔이 유행할 거라고 한다. 베어물면 새큼한 사과 즙이 흘러나올 것 같은 애플그린, 개나리의 여린 꽃잎 같은 옐로그린의 유혹이 조만간 도시를 누빌 것이다.
봄은 여인의 계절이라던가. 텔레비전에선 청결하고 영롱한 물방울 느낌, 투명한 꽃잎을 연상케 하는 화장품 광고가 한창이다. 올 봄엔 그 어느 때 보다 청초한 여인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한 봄처녀의 경쾌한 자태가 거리를 빛낼 날도 멀지 않았다. 아직 두터운 옷을 벗어버 리지 못한 이들에겐 겨울의 퇴각을 실감케 할 법하다.
봄이면 겨우내 칙칙했던 집안 분위기도 화사하게 피어난다. 벽지나 커튼 을 살짝 바꿔주기만 해도 봄빛이 돈다. 두릅이며 봄동, 달래, 냉이, 쑥갓 같은 봄나물도 식탁에 오른다. 아직까진 비닐하우스산이 대부분이지만, 봄나물 특유의 상큼한 향과 쌉쌀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봄나물은 살짝 데 치거나 삶거나 쪄서 무치는 게 제맛이다. 무엇보다 아이를 처음으로 학교 에 보낸 부모의 마음이 희망으로 부푼다. 어느새 이만큼 컸을까.
세상살이에도 봄기운이 찾아든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신부는 언제봐도 화사하지만 봄엔 더욱 그렇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가까운 야외를 찾는 부 모의 모습에선 푸근함이 느껴진다. 도심의 화랑가에도 봄빛이 분분하다. 봄을 주제로 하거나 제재로 삼은 전시회가 한창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도 새옷을 갈아입는다. 저 멀리 남도 의 산자락은 고로쇠 약수를 마시기 위해 찾아든 관광객들로 붐빈다. 봄도 맞고 건강도 지키는 여행길은 흥겹 다. 봄은 언제나 생동한다.
유강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