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제1야당에 무얼 기대할 것인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인간사회의 변함없는 슬픈 주제인가.

요즘의 한국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하나 돌아볼수록 착잡하기 그지 없다.

여기 두가지 ‘사실’이 우리 앞에 절망적으로 버티고 서 있다. 하나는 이른바 여당과 야당이 합의해 통과시킨 노동관계법의 새로운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금세 알 수 있 겠지만, 합의안이라는 것이 그동안 새로운 법안을 주장해온 노동계의 의 견이나 기대와는 얼마나 결정적으로 동떨어져 있는지 놀랍고도 놀라울 정 도다. 나아가 바로 그런 안을 총파업 때부터 지금까지 마치 노동자들의 편을 드는 것처럼 해온 제1야당 국민회의와 제2야당 자민련이 지지해 국 회에서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하나하나 보자. 보통의 월급쟁이 그러니까 피고용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가장 비상한 관심을 모아왔던 문제라 할 수 있는 정리해고 문제는 ‘2년 간의 시행 유예’와 모호한 수사에 둘러싸인 채 그대로 유지·관철돼 버 렸다(‘경영악화, 구조조정과 기술혁신을 위한 업종전환 등 긴박한 경영 상의 필요 때’ 하는 정리해고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 에 하는 정리해고의 차이를 나는 구별하기 매우 힘들다. 아마 대다수 노 동자들도 그럴 것이다). 파업기간중 임금지급에 관한 문제도 표현만 완화 시켰을 뿐 사용자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성격이 짙다. 거기다가 이 문제에 대해선 만일 쟁의기간중 임금요구 목적으로 쟁의행위를 하면 처벌 하겠다고 개악에 개악을 거듭했다. 그 악명높은 날치기안보다도 더 개악 된 조항이다. 단체협약 유효기간도 지금까지의 ‘1년 이내’에서 날치기 안 그대로 ‘2년 이내’로 밀어붙였다. 그나마 노동자쪽에서 단체협약이 라는 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시기를 현재의 1년 단위에서 사실 상 2년으로 연장시킴으로써 노동쪽의 합법수단은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 결국 전체적으로 노동관계법은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하는 ‘복수노조 상급단체 즉시 허용’이라는 것을 빼곤 이전의 날치기안과 내용상 다를 게 없는 개악안을 관철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개악안의 국회통과를 위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0일 각각 의원총회 라는 절차까지 거쳤다. 솔직히 말해 자민련이야 과거의 정치적 뿌리를 봐 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회의의 이런 행위는 노동계와 상 당수 지식인으로부터 비판받아 마땅하다. 결국 국민회의는 지난해 말 문 제의 노동관계법이 국회를 날치기 통과해서 무효라는 절차적인 민주주의 만을 문제삼았을 뿐 내용상으로는 정부 여당과 다를 게 없는 노동관, 노 동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선언한 셈이다.

바로 이런 야당의 한계를 일찌감치 일반 시민대중들은 알았던 것일까. 여 기 또하나 흥미있는 ‘사실’이 있다. <한겨레21>이 지난 3월7일과 8일 실시한 창간 3주년 특별여론조사 결과 올 대통령 선거에서 ‘재야/노동계 독자후보에게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전체의 42.4%가 ‘반드시’또는 ‘가능하면’ 투표하겠다는 응답을 한 것이다. 이건 놀랄 만한 수치다. 비록 이 응답의 배경에는 그동안 총파업시민항쟁을 거치며 기성정당에 대 해 반발하는 성격이 깔려 있고, 실제 대선국면에 들어갔을 때 그 현실적 의미를 지금처럼 강력하게 유지할 것인가 다소 유보적으로 볼 수밖에 없 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지금 시민대중의 밑바닥에는 기성의 3김정치에 대 한 실망과 환멸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다시 여기서 우리는 이상과 현실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과연 노동운동 권과 재야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이 특별여론조사에 나타난 결과를 확신하는 대로 그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인가? 독자후보론은 이상론인가? 정권교체의 필요성이라 는 현실 앞에서 포기돼야 하는 것인가? 저처럼 보수성향으로 치닫는 국민 회의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는 것인가?

물음은 꼬리를 문다. 확실한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만일 독자후보론이 현실로 관철될 경우(그 정치철학은 별개로 하더라도) 야권은 사실상 갈라 지게 된다. 그것을 감수하면서라도 독자후보는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비판의 입장은 계속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 이후까지도.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현재 국민회의가 여러 국면에서 드러내고 있는 보수우익적인 정책방향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에 대해 계속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야권의 앞길에는 피할 수 없는 대논쟁이 가로놓여 있는 것 이다.

아직 어느 입장이나 의견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한국당이 앞으 로 대선과정을 통해 어떻게 자신들의 정책방향을 가다듬어 갈지도 유동적 이라는 측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물결 앞에서 한국정치는 이처럼 진통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창간 3주년 기념호의 정치관련 기사들이 이런 논쟁의 추이와 판단에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이 모든 진통과 논쟁이 앞으로 한국정치의 질 적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참으로 좋겠다.

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