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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3월20일 제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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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동북아평화센터 회원들'이 지난 1월 흥부마을인 성산리를 방문해 현지조사를 하고 있다.)
흥부전은 친근하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이미 그림책, 인형극, 만화 등 에서 우린 자연스럽게 흥부전을 접한다. 권선징악과 형제우애가 주제인 흥부전은 우리 정서에 그대로 녹아 있어 다양한 아류 형제작들을 무수히 낳았다. 최근 <형제의 강>에 이르기까지.
최남선이 흥부전 연구의 시초
흥부와 놀부는 조선 말엽 서민사회의 신분적 특징과 유형을 반영하는 전 형적 인물이다. 대조적인 이들에 대한 인물평가는 현대에 와서 학계뿐 아 니라 사회적으로도 분분했다. 흥부전 연구의 시초는 최남선(<몽고의 흥부 놀부>, 1922)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몽고의 <박 타는 처녀> 설화와 흥 부전의 일치성을 설명하며 흥부전 연구의 장을 열었다.
최남선의 뜻을 이어 흥부전을 학문적으로 분석, 체계화시킨 이는 김태준 이었다. 그는 <조선소설사>(1939)를 통해 흥부를 착한 사람으로, 놀부를 악한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체계를 확립시켰다. 이는 김기동(<이조시대 소 설론>, 1959), 신기형(<한국소설발달사>, 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계 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전통적 평가를 거부한 최초의 인물 은 주왕산이었다. 그는 <조선고대 소설사>(1950)에서 흥부를 “가난하면 제힘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생활방도를 생각할 것이지, 형제간의 의리만을 찾아 형만을 의존하려는 생활의식은 다 저 유교교리에 중독되어 생산방면 에서 유리된 까닭” “흥부는 형도 의존할 수 없게 되면 요행을 바라 힘 안 들이고 박씨 같은 것을 얻어 졸지에 부귀를 누리고 싶어하는 인물”이 라고 혹평했다. 이런 평가는 당시로선 상당한 파격이었다.
흥부 비판은 10여년 뒤인 1966년 최인훈의 소설 <놀부뎐>에서 더욱 신랄 하게 드러난다. 고대소설을 패러디한 그의 사본고전(私本古典) 시리즈 중 하나인 <놀부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흥부는 놀부와 똑같이 유산을 분배받는다. 놀부는 모진 고생 끝에 5년 만에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흥 부는 잡놈에게 속아 벼락부자를 꿈꾸다 알거지가 되고 만다. 여기에 자식 들은 게으르기 짝이 없어 비참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놀부는 흥 부가 돈을 물쓰듯 한다는 풍설을 듣고 흥부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캐묻는 다. 이에 흥부는 ‘제비 다리가 어쩌구저쩌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 나 놀부가 ‘허무맹랑한 소리말라’고 윽박지르자 흥부는 사실대로 고백 한다. 즉 산에서 온갖 보화가 들어 있는 큰 철궤를 발견해 가져왔다는 것 이다. 놀부는 ‘화가 있을 것이니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한다. 둘은 철궤를 지고 산으로 가다가 관원에게 잡힌다. 그 궤는 봉고파직한 전라감 사가 숨겨뒀던 것으로 복권이 되어 찾았으나 그곳에 없자 나졸을 매복해 뒀다가 이들을 잡은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옥에서 온갖 수모를 겪다가 죽 고 만다.
황당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이 소설을 통해 최인훈은 놀부, 흥부의 인간상이 아닌 변모된 사회상을 이야기하려 했다. 6�25, 4�19, 5�16 등 한국현대사에 굴곡을 이루는 일련의 사건과 외래문화 유입 등으로 과거 윤리관은 무의미하게 됐다. 거기에 60년대 근대화 작업은 ‘돈이 최고’ 라는 천민자본주의의 확산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사회를 근간부터 흔들었 다. 공업화와 도시화는 시민의 성공욕구를, 성공욕은 과열된 경쟁을, 과 열된 경쟁은 효과적이고 능률적이면 된다는 편법주의를 낳았다. 이로 인 해 사회질서가 파괴되고 온갖 부조리가 생겨났다. 최인훈은 <놀부뎐>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를 고발한 것이다.
교과서 `흥부전' 삭제 요구도
(사진/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서.)
이같은 사회상을 반영하듯 60년대 말 이후 흥부가 비판되고 놀부가 재평 가되는 일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논의의 시초로 흥부전에 대해 가 장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는 논문이 조동일의 ‘흥부전의 양면성’(1969 )이다. 그는 흥부전의 내용을 고정체계면과 비고정체계면으로 나눠 착한 흥부와 나쁜 놀부라는 고정체계면이 아닌, 이런 양태가 엇갈리게 나타나 는 비고정체계면에 오히려 이면적 주제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비고정 체계면을 통해 살펴본 흥부는 소비하는 만큼 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부 에게 쫓겨났으며, 살아갈 대책이 없을 뿐 아니라 살아갈 자신조차 없다. 그의 논문은 가치중립적인 논지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심리적으로 놀부 의 손을 들어주는 면이 강했다.
조동일 이후 흥부비판 분위기는 학계에서 지배적이었고 사회적인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 교육학 교수는 교과서에 실린 ‘흥부전’을 삭제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사회 각계에서 ‘놀부 새롭게 평가하기, 흥부 깎아내리기’가 일반적이었다. 지금도 ‘놀부 보쌈’ ‘놀부 부대찌개’ 집은 있어도 흥부집은 찾아볼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배금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우리 사회에선 놀부 추종세력만이 그득하게 된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 반론을 제기한 이가 임형택이다(<흥부전의 역사적 현실성> , 1969). 그는 놀부를 경제적 이익 때문에 가부장적 윤리까지 거부했으며 사회윤리마저도 파괴한 인물로서 결국 그 끝없는 이익추구로 자멸했다고 주장했다. 즉 박을 켜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지만 결코 중단하지 않는 점 은 노름꾼 심리, 요행심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흥부는 재물을 갖고 형 제간에 다툴 수 없어서 순순히 물러서는 성인이었으며 생활을 위해 양심 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 애초에 박 속을 지져 먹고 바가지는 팔아서 쌀을 얻으려고 했을 뿐 놀부 같은 사행심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흥부의 승리는 양심과 성실이 승리한 것이 며 놀부의 패배는 반사회, 반도덕적 이기주의의 패배로 이는 사회모순에 대한 서민층의 준열한 재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흥부비판의 최선두 에 섰던 김광순은 <흥부전의 주인공에 대한 인성분석>(1973)에서 같은 이 야기로 임형택과 정반대의 논지를 펴며 조목조목 흥부를 꾸짖고 놀부를 칭찬했다. 놀부의 냉대는 흥부에게 자립정신을 불러일으켰으며 놀부가 흥 부로부터 화초장 하나를 빼앗아갈 때도 흥부의 하인을 뿌리치고 자신이 지고 가는데 이를 자립심의 발로로 봤다. 또 제비를 해친 것은 잘못이나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그 욕망만은 간과할 수 없으며 거듭되는 불행에 도 13개의 박을 모두 타는 끈질긴 의지는 당시 무기력했던 조선인에게 모 범적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흥부는 소극적이며 나태하고 무기력한 인물의 표상으로 평가했다. 노력하지 않은 데서 온 가난을 산소에 돌리려 했으며 , 주관도 없이 주면 먹고 시키는 일이나 하는 인간으로 분석했다. 또 흥 부는 끼니도 못 잇는 처지에 남은 노잣돈으로 모두 떡을 살 만큼 무계획 했으며 수숫대나 뺑대 반짐을 가지고 한나절 만에 집을 지은 점을 들어 나태한 인물일 뿐 아니라 부상당한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줄 만큼 한가한 시간을 보냈기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봉건사회 흥부, 산업사회 놀부…
이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흥부전의 전통적 인물평가를 뒤집는 것이 8 0년대까지의 일반적 분위기였다. 본문 마지막에서 패퇴한 놀부는 에필로 그에서 컴백에 완전 성공했고 흥부는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분 위기였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맹목적인 부의 추구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불 거지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게 보면서 이런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흥부에 대한 재평 가였다. 비록 놀부 재평가 때만큼 폭발력을 지녔거나 급진적이진 않지만 이런 움직임은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흥부와 놀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이처럼 시대관을 그대로 반영한 측면이 강하다. 우린 산업화 과정의 과열된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이기는 방법만을 생각했고 그 결과 ‘나’ 하나만이 존재할 뿐 타인은 안 중에도 없었다. 놀부에겐 친구도 없다. 결국 고립된 상태에서 스스로 소 외되어 버렸다. 놀부가 산업화 사회의 한 전형으로 긍정될 수 있던 것은 부정적이던 전대의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 서의 흥부, 산업화 사회에서의 놀부, 그리고 산업화 이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우린 다시 흥부를 그리워하고 있다.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