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3월13일 제 148호 한겨레21

이한영씨 청부살인됐나

(사진/전화번호를 알려준 죄? 심부름센터 사장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한영씨 피살 사건은 오히려 의혹만 더 커졌다.)

이한영(37)씨가 마침내 숨졌다. 북한 김정일 비서의 전 동거녀 성혜림(58 )씨의 조카로, 한때 북한의 로열패밀리에 속했던 그가 파란만장했던 망명 자의 삶을 접은 것이다. 이씨는 이제 숨을 거뒀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아직도 살아 있다. “누가, 왜 그를 쏘았는가?”

경찰의 수사는 여전히 원점을 맴돌고 있다. 지난 1월31일과 2월5일 심부 름센터를 통해 이씨의 주소지를 물어온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확보한 게 고작이다. 그들이 동일인이 아니라고 추정하는 것을 빼면, 경찰이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소재는 물론 인적사항조차 안개에 싸여 있다. 용의자들은 오히려 사건의 핵심적인 의혹을 깊게 한다. “정말 북한 공작 원의 짓인가?”

지나치게 서툰 용의자들

용의자들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다. 우선 심부름센터 통화내용을 보면 이 들의 이씨에 대한 정보가 극히 미미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1월31일 전화 를 건 용의자는 이씨를 거의 모르고 있다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꼭 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이름은 이한용이고, 64년생인데, 주소지를 알 수 있 나? 지금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고, 수인번호는 1421번이다.”

용의자가 이씨의 이름과 나이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씨는 ‘이한용’이란 이름을 쓴 적이 없고, 주민등록상 61년에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수인번호 역시, 이씨의 자서전 <대동강 로열패밀리의 서울잠행 14년>에 나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별한 정보가 아니다. 더욱이 그는 이미 출소한 상태다. 살인동기를 가진 자가 표적에 대해 이 정도로 모른 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다. 그가 북한 공작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은행 폐쇄회로에 찍힌 용의자들의 행적도 석연치 않다. 경찰이 공개한 폐 쇄회로 필름을 보면 이들이 은행을 이용하는 데 서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1월31일의 용의자는 은행에 들어서자마자 창구로 가 직원한테서 입금의뢰서를 받아 돈을 부친다. 초등학생도 웬만하면 입금의뢰서가 민원 인 테이블에 놓여 있다는 걸 아는 우리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2월5일 의 용의자는 송금절차를 몰라 허둥대다 옆사람에게 묻기까지 한다. 경찰 이 애초 남한 사정에 밝은 고정간첩이나, 치밀한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공작원의 소행 운운했던 게 무색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일각에서 새로운 해석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바로 청부살인론이다. 이씨에게 총격을 가한 범인들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범행을 사주한 진짜 범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용의자들은 그 꼭두각시에 해당한다. 경찰의 한 간부는 “이번 사건이 살인동기를 가진 자의 직접범행이 아닐 공산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누가 이씨를 쏘았 느냐는 의문이, 누가 이씨를 쏘게 시켰느냐는 의문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부업자에게 표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 경찰은 배후의 범인이 신분노출을 몹시 경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 약의 경우 청부업자가 잡히더라도 자신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 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뤄 범행이 여러 번의 청부를 거쳤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범행동기를 가진 배후가 철저하게 신분을 세탁했다는 것이다. 청부에 청부를 거치는 동안 이씨에 대한 정보는 극히 초보적인 수준만 남 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청부업자를 부릴 정도의 힘이라면…

이런 가정 아래서는 용의자들이 국내 사정에 그토록 어두울 수 있는가 하 는 의문도 다소 풀린다. 진짜 범인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경찰의 추적이 어려운 국외의 청부업자를 골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용의자들이 일단 우리말을 구사하는 점으로 미뤄, 러시아나 중국의 동포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 결국 여러 단계에 걸쳐 신분을 세탁한 누군가가 이씨를 살해 하라고 청부했고, 이를 맡은 청부업자는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입국 해 이씨를 추적했을 공산이 크다.

물론 이런 추론을 따르더라도 범인의 실체는 여전히 의혹으로 남는다. 누 군가를 죽이기 위해 청부업자를 부릴 정도의 힘을 가진 배후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범행동기 역시 마찬가지다. 사건은 어쩌면 영원히 미궁에 빠질지도 모른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3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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